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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Oct 04. 2022

2-18. 제주, 설국

불타버린 마흔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18. 제주설국          



대한민국 남쪽 제주, 이곳에서도 따뜻한 아랫동네 성산에서 살고 있었지만, 겨울은 여전히 추웠다. 물론 서울에서 겪던 매서운 추위는 아니었으나 대개의 생활을 난방이 된 사무실이 아닌 늘 상 바닷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했었기에, 제주의 첫 겨울은 꽤 추웠던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깊은 각인은 전적으로 물리적 온도에서 기인 된 것만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스며들고 있던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걱정이 얼음장 하나를 얹었고, 반년가량 이어진 무위도식 삶의 결과로 바닥을 보이던 통장잔고는 졸라맨 허리띠 이상으로 심리적 배고픔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말 그대로 몸과 마음 모두 추운 겨울이었다.  

   

제주도는 시내 일부를 제외하고는 도시가스가 연결된 곳이 없어 여전히 주택의 난방 보일러 연료로 LPG가스나 등유를 사용한다. 난방연료는 도시가스보다 훨씬 비싸서 육지에서처럼 등 따숩게 지내고 나면, 난방비 폭탄을 맞게 된다. 우리가 세든 집 역시 기름보일러 난방이었는데, 빈한한 처지였지만 겨울 초입, 큰맘을 먹고 주유소 트럭을 불러 등유를 한드럼 가득 채워 놓았다. 예전 어릴 때, 겨울이 오면 엄마는 큰맘을 먹고 연탄을 오백장씩 들여놓으셨다. 광 한귀퉁이에 깜장칠이 뭍었지만 밝은 표정으로 연탄을 쌓던 부모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힘드셨겠지만 마음 든든함이 느껴지던 엄마의 표정이 기름을 채우던 내 얼굴에서도 드러났을 테다. 이제 어려운 형편 속에서 오남매를 키워낸 고단했던 아빠와 엄마의 삶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이미 어른이었지만 스스로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목돈 들여 채워놓았던 기름통 게이지는 낮은 온도계 눈금 마냥 뚝뚝 떨어졌다. 기름통이 비는 만큼 마음에 가난이 몰려 들었다. 제주라 덜덜 떨 정도는 아니었기에 아내와 상의해 집 온도를 낮추고 옷을 더 껴입고 살기로 했다. 각 방에서 재우던 아이들을 불러모아 거실에서 같이 잠을 자며 체온을 나눴다. 제주에서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고 싶었다. 의지를 내서 삶에 활기를 더해야 했다.     


한라산에 눈이 내리면 아이들과 산을 올랐다. 뽀득뽀득 눈내린 등산로를 걸어 사라오름을 다녀왔다. 불평하던 아이들도 눈사람을 함께 만들고 휴게소에서 따뜻한 컵라면을 나눠 먹으니 설산이 주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1100 고지도 다녀왔다. 편하게 도달한 고지에서 신나게 아이들과 눈싸움을 했다. 아내와 단 둘이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눈꽃산행을 했다. 파란 하늘과 순백색 한라산이 선명한 원색의 대비를 이룬 광경에 입이 쩍 벌어진 채로 환호성을 질렀다. 혼자 관음사부터 백록담까지 묵묵하게 걸었다. 다섯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한라산 곳곳에 흩뿌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을 했다.     





제주, 특히 산남의 바닷가 마을들은 눈 쌓인 풍경을 보기가 어렵다. 눈이 오더라도 바람에 흩날려 버리고 이내 녹아 버렸다. 이런 제주에 큰 눈이 내렸다. 밤내 사라사락 내리더니 용케 녹지않고 소복스러운 하얀 눈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풀지 않은 이삿짐 박스에서 부츠를 찾아 신고 학교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많은 아이들이 상기된 얼굴로 눈밭에서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부모 여럿도 합세하여 운동장은 시끌벅적한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과 어른들 역시 행복한 시간에 빠져들었다. 이날 참 행복했었다.



중산간 지역에 큰 눈이 내리면 천연 눈썰매장으로 변모하는 명소가 여럿 있다. 보통 찻길 옆 오름의 경사면이나 한라산 중턱에 눈썰매장이 펼쳐지는데, 순백색의 오름을 배경으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차림으로 눈썰매를 타는 모습은 탱글탱글 달콤한 귤 과즙이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느낌이다. 중산간 지역에 큰 눈이 내렸다 해서 이웃들과 함께 마방목지에 갔다. 가을까지 싱그러운 초록이 가득했고 방목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던 야트막한 경사면이 신나는 눈썰매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로 갓길에는 주차된 차들이 늘어섰고, 김을 내뿜는 따뜻한 어묵을 파는 트럭들에 사람들 줄이 길게 생겨났다.     


추위를 잊은채 아이들과 아빠, 엄마들이 즐겁게 눈썰매를 탄다. 그리고 그 옆엔 아름들이 노송들이 눈보라 속에서 창연한 흑백사진의 맛을 볼 수 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눈썰매장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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