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 日記
길을 달리다 보면 버려진 밭에 유채꽃이 한가득 피어있다. 검은 밭담과 어우러진 노란 유채는 제주에 봄날이 피었음을 알려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입니다"
서울시청 앞 커다란 벽에 써진 글이라고 한다.(이 글은 시민공모를 통해 주기적으로 바꾸는데, 무척 신선하고 좋은 글들이 많다고 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아 무덤덤해
때로는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일어났으면 하는 일상속에서 "오늘"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유채꽃을 보면서, 지고나면 사진도 못 찍은 채 흘려보냈다고 자책하기 싫었기에 날씨 좋은 주말, 가족과 섭지코지에 들러 어설픈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나도 좋은 말을 붙여본다.
내 삶의 봄날! 맑으나 궂으나 바로 오늘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성산일출봉 뒤편 아득한 태평양에서 떠오르는 새해를 맞이했다. 어느덧 제주에서 여섯 달을 지냈다. 오감을 올올이 일깨우던 제주의 순간들을 이제는 덤덤하게 흘려보낼 만큼 제주살이는 무디어갔지만 흐르는 제주의 풍경은 반짝이는 윤슬로 남아 내 삶 모퉁이 곳곳을 빛내 주었다. 새해에도 나를 압박했던 큰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될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품어준 제주섬이 선사한 안도감 덕분에 문제를 인식하는 시선은 불안과 염려가 아닌 긍정의 영역에 속해 버렸기에 예전처럼 노심초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감사했다.
얼마 후면 나는 맞닥뜨려야 하는 나뉜 두 갈래의 길에서 최종 선택을 해야 했다. 한 길은 회사를 사직하고 제주에서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이고, 한 길은 제주 삶을 마감하고 다시 서울의 회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간 열심히 궁리했지만 딱히 제주에서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복직하더라도 회사가 기꺼운 마음으로 나를 맞아줄지도 의문이었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어서 심란할 때는 엄마 품 같은 제주섬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제주 곳곳으로 난 길을 무작정 걸었다. 제주에는 걷기 좋은 길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었다. 걷기는 다리를 곧게 하고 몸에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더불어 생각의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십분 발휘했다. 내딛는 한걸음만큼 잡념은 사라지고 긍정의 밀물이 한걸음 몰려왔다. 이 느낌이 좋아서 올레길과 중산간의 길들을 타박타박 홀로 걸었다.
올레 5코스를 걷던 날이었다. 관목숲을 헤집고 난 낮은 길을 통과하니 평소에는 메마른 천이던 내창에 물이 제법 흘렀다. 안전하게 내창을 거슬러 가 다리로 건넌 후 내려와야 했지만 뛰어넘고 싶은 객기가 솟구쳤다. 얕은 곳을 징검다리 삼아 겅중겅중 뛰다가 이내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물에 빠졌다. 손에 든 카메라를 높이 치켜들어 침수를 막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발과 바지가 흠뻑 젖었다. 찝찝한 감정으로 남은 길을 걸어야 했다.
그 길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 살림을 총괄하는 상무님의 전화였다. 상무님은 십 년도 넘게 지난 내 결혼식 순서지를 보관하셨다가 내게 건네줄 정도로 다정다감한 분이셨는데, 전화로 과분한 제안을 하셨다.
‘제주지사에 자리가 나는데, 조금 이르게 복직을 할 수 있겠냐고?’
갈림길이 시작되는 선택의 순간에서 상사의 전화는 확신이 증표가 되었다. 힘 들었을 때 도피처가 되어준 제주에서 익숙하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재개하게 되어 감사했다. 제주에서의 휴식으로 다시금 에너지가 완충되었기에 다시 한번 달려 보겠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복직이 시작된 날, 아침 7시에 성산 온평리에서 제주시내 사무실까지 출근을 했다. 약 50Km의 중산간 오름들이 굽이치는 도로를 달리며 이른 아침을 깨쳤다. 그리고 십여년간 해왔기에 익숙했지만 그간 의지를 내어 잊으려 했던 업무 지식들을 다시 일깨웠다. 제주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은 정방폭포의 물줄기처럼 쏟아져 포말을 흩뿌리고선 넓은 바다로 흘러갔다. 월말 25일, 예전처럼 통장에 월급이 입금되었다. 아내가 좋아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먹을 제주시내 치킨과 피자를 싣고서 퇴근했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맛보는 도시의 맛을 좋아했다. 맛있게 먹는 세 아이들을 보니 앞으로 회사에서 받을 스트레스는 견뎌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주에 봄이 왔다. 유채가 노랗게 들판에 번졌고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그리고 하얀 벚꽃이 송이송이 피어나더니 화사한 봄의 기운이 사위를 연분홍으로 물들여 갔다.
아침저녁에는 여전히 쌀쌀하지만 봄이 왔어요. 유채꽃과 매화가 피더니 이제 벚꽃이 슬금슬금 도로변을 침노하여 사위를 화사한 분홍빛으로 물들이네요.
저는...... 작년 6월 다시 회사에 돌아가지 않을 수도(못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1년짜리 육아휴직을 하고 제주에 내려왔었지요. 겨울을 보내고 휴직 기간의 끝이 보이자, 마음이 초조하긴 했어요. 제주살이는 재미있게 즐겼는데, 어떻게 먹고 살지 생각하지도 않았었거든요. 사실 무엇을 벌일 수 있는 여러모의 여건도 갖추지 못했고요. 실행 가능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지요.
그냥 제주에서 부유하고 싶었어요. 부평초같이, 유목민처럼.
걷고, 쉬고, 먹고, 그리고 잠잠히 침묵하다 보면 검은 심연 속 깊이 침잠해 있다가도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어김없이 올라와 나를 옭죄메는 쓴 뿌리를 솎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닉네임 "온평리 이평온"처럼 평온이라는 것을 추구했나 봐요.
작년, 40년간의 육지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온 것은 마치 도망과 같았어요. 지쳐버려 에너지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던 너덜너덜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피곤하면 몸이 잠을 원하고 배고프면 몸이 밥을 원하듯이 본능적으로 제주에 끌렸던 것 같아요. 제주, 이곳을 누구도 나를 헤치지 못하는 나의 도피성, 김영갑 작가가 꿈꾸던 이어도로 여겼나 봐요.
그래서 남들은 수년에 걸쳐 준비하는 제주 이주를 한 달 사이 휴직하고 제주에서 살 집을 구하고 부리나케 내려와 버린 거죠. 제주 역시, 육지 못지않게 치열하고 더 척박한 삶의 현장이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세 아이와 전업주부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당장 월급을 받지 못하면 마이너스 통장의 굴레가 멈춰버려 움짝달짝도 못하는 형편에 처해 버릴 빈한한 가장으로서 무모하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정을 한 것일 수도 있었어요. 그래도 감사한 게, 이러한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잘 아는 아이들 엄마가 그리고 아이들이 용기를 주고 잘 따라와 주었다는 것이에요.
아무튼 궁즉통(窮卽通)이라고, 그 무모함 덕에 많은 사람들이 꿈꾸지만 쉽게 오지 못하는 이 제주에 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게, 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수입이라곤, 정부가 주는 육아휴직 수당 85만원과 가끔씩 키위 따고 귤 따는 알바나 농어촌 인구조사 같은 단기 알바에서 얻는 푼돈밖에 없었는데도, 마이너스 없이 제주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허리띠 졸라메고 눈물 섞인 빵을 먹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에요. 거창하게 해외여행도 가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했는데도요.
아이들은 학교에 잘 적응하여 신나고 재미나게 놀고 있으며(큰아이는 작년엔 반장을 하더니, 올핸 전교부회장을 하네요 ^^), 담임선생님들과의 면담에서는 제 아이들이 학습 분위기를 잡아주는 등 선생님이 믿고 의지할 아이들이라는 칭찬(모든 아이들에게 하시는 칭찬일 수도 있겠지요!)을 들었다니, 괜시리 부모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제 복직한 지 2주가 되었어요.
회사 살림을 담당하는 상무님에게 전화가 와서, 제주에 복직 발령을 내주면 조금 이르게 복직하겠냐고 물으시길래,
감사하게 그 제안을 받았어요. '제주가서 살겠다고 육아휴직한 놈 뭣이 예쁘다고 제주에 복직 발령까지 내주는 거지? 너! 참 복도 많다' 싶어요. 그래서 이제 제주시로 출퇴근을 해요.
변화라면, 이번 달에 월급이 들어왔다는 것과, 점심과 저녁 회식으로 제주시내 곳곳 로컬 맛집들을 알게 된다는 것, 근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부모님과 장모님이 안도하신다는 것, 그리고 "아빠가 이제 돈 버니깐 아들들 맛있는 거 사줄께"라고 큰소리 빵빵 치고선 퇴근길에 피자헛 피자나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아이들 앞에서 우쭐댈 수 있다는 것이겠네요.
저 다니는 회사는 순환보직제라 제주에서의 직장생활이 일년이 될지, 수년이 될지 모르지만, 우선은 멀리 바라보고 걱정하기 보다는, 또 다른 일년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고 싶네요. 그러면, 또 다른 은혜를 맛볼 수 있겠지요.
제주에서의 일년은 고갈된 저에게 다시 생수같은 힘들을 준 것 같아요. 마치 시골집 물을 긷는 펌프에 붇는 마중물 같이, 제주는 또다른 제 속의 에너지들을 끄집어내고 있어요. 이제 채워지고 다시 길어 올려진 그 힘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내야겠어요.
제주에서의 지난 1년. 그리고 봄에 맞이한 삶의 변곡점!
이제 다시 새로운 제주에서의 1년을 살아보겠습니다.
- 복직하고 한달 후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