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을 감명 깊게 읽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갈 수 없고 땅 위의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까까머리 중학생을 면한 이후 자전거를 탄 적이 없었다. 통학하라고 아버지가 사주신 철제 MTB형 자전거를 타고 매일 4Km 넘는 시골 분지의 도로를 달렸었다. 아이들은 두터운 프레임에 넓은 타이어, 어깨를 펴고 등을 곧추세운 채 팔을 쫙 펴야 핸들을 잡을 수 있는, 기어도 무려 10단까지 있던 그 자전거를 ‘탱크’라고 불렀다. ‘탱크’를 페달로 저어간 중학교 3년간 고향 ‘장수분지’의 감수성이 사춘기 소년에게 흘러들었다. 삶에 여유가 흘러들자, 제주에서 바람 따라 자전거의 돛을 펼치고 싶어졌다. 자전거 바퀴를 굴려 나아갈 때,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수평선까지 감성의 지경이 넓어졌으면 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제주도에도 길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핏줄마냥 곳곳으로 뻗어 있다. 평화로와 번영로처럼 대동맥이 되는 큰길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고 있고, 516도로와 1100도로는 한라산을 에워싸 굽이쳐 있으며, 산록도로는 중산간을 연결하고 있다. 애조로(애월~조철)와 남조로(남원~조천)처럼 읍내 이름으로 조어한 길들이 7개 읍, 5개 면을 잇고 있고, 일주동로와 일주서로처럼 해안으로 제주를 휘감은 길도 있다. 실핏줄처럼 마을과 마을을 잇는 소로들은 올올이 퍼져 제주섬을 살아 운동력 있게 했다. 빠른 이동이 목적인 자동차 길이 있고, 느영나영 걸으며 제주를 만끽하기 좋은 올레길과 한라산둘레길도 있다.
제주환상자전거길은 나라가 인증한 국토종주자전거길 중 하나로 해안도로와 일주도로 234km를 이어 자전거로 제주를 한 바퀴 돌 수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이삼일간 길을 따라 풍륜의 노를 저어간다. 순풍이 등을 밀어 수월하게 저어가기도 하고 역풍을 뚫고 힘겹게 나아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자전거로 이 길을 돌아보고 싶었다.
자전거 가게에서 복고풍형 모양의 자전거를 샀다. 무거웠고 기어도 신통치 않아 잘 달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렴한 가격과 올드한 디자인에 끌렸다. 며칠 동안 틈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전거로 해안도로를 달렸다. 수십 년 만에 타보는 자전거였지만 한 시간 정도는 거뜬했다. 안장 위에 앉아 페달을 밟으며 보는 제주의 바다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페달을 밟는 긴장감이 허벅지에 딴딴한 자극으로 전달되니 설렘이 증폭되었다.
주말, 자전거 타기 좋은 날이었다. 아침, 간단한 짐을 꾸려 짐받이에 묶고 제주 동쪽 함덕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자전거 일주를 시작했다. 이틀간 제주를 한 바퀴 돌 계획이었다. 얼마 전 비슷한 시기에 온평리로 이사한 동갑내기 친구 승주아빠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자전거 종주 이야기를 꺼냈다. 승주아빠는 나의 허약한 체력으로는 이틀만의 완주는 어렵다고 했고 나는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우겼다.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밥내기까지 이어졌는데 호승심이 타오른 나는 이틀 만에 완주함으로써 꼭 이기고 싶었다.
씩씩하게 나아갔다. 함덕 해수욕장에서 해안도로를 달려 조천과 관곶을 지나 제주시내로 향해 난 길을 달렸다. 기분과 달리 자전거가 매끄럽게 구르지 않아 살펴보니 얇은 타이어 튜브에 공기가 빠져있었다. 연안부두 근처 자전거 가게에 삼천원을 주고 바람을 빵빵하게 채웠다. 자전거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용두암과 도두항, 하귀와 구엄돌염전을 지났다. 고내포구 다다르기 전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고내포구에 자리한 무인카페 산책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
점심밥은 애월을 지나 곽금 어디쯤에서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옛 속담처럼 김치찌개와 계란 프라이 하나 담긴 백반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서쪽의 바다는 담백했다. 높게 드리운 구름이 하늘을 반쯤 가린 탓인지 말랑한 햇빛 아래 바람도 상냥히 불었다. 한림을 지났고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심어진 신창해안도로를 달렸다. 한 오후 일과리에서 쉬었다. 돌의자에 앉아서 대정 앞바다에 돌고래 무리가 유영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때부터다. 고비가 찾아온 것이. 다리는 아프지 않았는데, 좁고 딱딱한 안장에 장시간 사타구니가 쓸린 모양이었다. 안장에 앉으면 따끔하고 쓰라려서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짐에서 수건을 꺼내 안장에 대보기도 하고 다리를 한껏 벌려 어기적대면서 자전거를 굴렸다. 몰려온 피곤과 통증에 산방산 지난 언덕길에서 자전거를 끌어야 했다. 도로 옆 버스정류장 벤치에 퍼지듯 누웠다.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한 시간여 혼곤한 잠에 빠졌다. 민폐를 끼쳤지만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되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에도 묵묵히 자전거를 탔다. 그리고 깜깜하게 드리운 어둠을 갈라진 가로등 빛으로 쪼개며 예약해 놓은 서귀포 시내 게스트하우스까지 달렸다.
이튿날은 수월했다. 이른 아침 든든히 아침밥을 먹고 페달을 밟아 위미와 남원, 표선까지 나아갔다. 신산리 해안도로를 지나면서 양어장 소장으로 일하는 친한 형님을 찾아가 달달한 커피 한잔을 대접받았다. 성산 일출봉을 뒤로 하고 종달리까지 달렸다. 제주 북쪽 바다를 만나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등을 밀어주는 고마운 바람이었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자전거의 전진을 막는 앞바람이라 힘들게 나아갔다. 하도리와 세화, 월정리와 김녕, 북촌을 거쳐 종착지인 함덕에 다다랐다.
이틀에 걸쳐 자전거로 제주 한바퀴를 돌았다. 자전거에서 내리자 팽팽한 다리근육이 땅을 박차 오를 것 같이 당겨졌다. 곤두선 신경이 잠잠해 지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다시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었고 주말 특별한 여행을 마친 나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친구인 승주아빠와의 내기에서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