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림 & 사려니숲
습관이 참 무섭다. 늦잠도 좀 자보고 여유도 부려 보고 싶은데, 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떠지고 침대에서 더 자려고 용을 써 봐도 소용이 없다. 생체시계가 다른 아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산책도 하고 체조도 하다 잔디의 잡초도 몇 개 뽑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놀 만큼 놀다가 집에 들어와 알쓸신잡 덩어리 티브이 채널과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새 아내가 출발 준비를 한다. 그렇게 늦은 아침을 먹고 10시 쯤 비자림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보니, 또 산굼부리를 지나고 있다. 이쁜각시가 “산굼부리 가 봤어요?” 한다. 내가 “우리 신혼여행 때 들렀잖아”라고 하니 아내는 기억이 없단다. 하긴 벌써 30여 년이 지났으니 기억이 나지 않을 만도 하지. 그런데 산굼부리가 뭐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냥 언덕 비슷한 거였는데, 맞나? 나중에 위키백과를 뒤져보니, 산굼부리는 ‘산이 구멍난 부리’라는 말뜻을 가진 한라산의 기생화산 분화구로, 백록담과 달리 용암을 분출하지 않은 평지에 있는 분화구라고 한다. 이런 화구를 마르(Maar)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산굼부리가 유일하며 세계적으로도 일본과 독일에 몇 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특이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분화구 안에는 원시상태의 식물군락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관광과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높아 1976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사진> 비자림
비자림에 오후 1시경에 도착했다. 비자림은 원시의 자연 그대로 인 것 같은 분위기의 숲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어 항상 다시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계절이 달라서 그런가? 여름에 방문했던 비자림의 기억과 지금 봄에 방문하는 비자림의 분위기가 살짝 다르다. 좋았던 추억을 안고 설렘으로 방문했는데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을 맞이하는 듯한 낯선 느낌이랄까, 아무튼 기분이 묘하다. 어쨌든 비자림의 숲속을 즐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나이가 환갑이 지나도 배고픔을 못 참는 건 여전하다. 숲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쁜각시가 말없이 일어나 출구를 향한다. 알아차렸나? 참 사랑스런 사람이다. 사려니 숲을 가는 도중에 보이는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 점심을 해결했다. 옛집2라는 식당인데, 메뉴가 국수 종류밖에 없어 고기국수를 주문하고 먹었는데, 입맛에 확 당기지 않는다. 배는 고픈데 당기지는 않는 묘한 느낌이다. 옛날엔 배고프면 물불 안 가렸는데, 이제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배가 고프지 않은 게 더 낫지 않을까? 참 나란 놈은 욕심도 많다. 스스로를 책망하며 사려니 숲가는 길에 유채꽃이 만발한 카페가 보인다. “저기 가서 차 한 잔하고 갑시다.” 하고 차를 돌렸다.
<사진> 카페 “그렌코.”
카페 “그렌코.” 젊은 친구들한테는 꽤 알려진 곳인가 보다. 사람들이 꽤 많다. 가격이 일반 카페의 두 배 이상이다. 음료에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고, 수익의 일부는 미혼모를 지원하는데 쓰인단다. 젊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참 신선하다. 관광버스를 끌고 와 사진만 찍고 가려는 관광객과 이를 막으려는 주인장의 모습 또한 재미있다. 차 한 잔 마시고 마지막 여정인 사려니 숲으로 향했다. 사려니 숲은 언제나 좋지만, 늦은 오후라 그런지 조용해서 더욱 좋다.
<사진> 사려니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