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토종이다' 그 열 번째
한때, 퓰리처 상을 꿈꿨다. 실제로, 꿈에서 퓰리처 상을 받은 적도 있다. 깨기 싫은 꿈이었던 터라, 늦잠을 자서 1진 선배에게 된통 혼났지만.
하지만, 한국어 신문에서 근무하는 현재로선 받을 수 없다. 퓰리처 상은 미국의 저널리즘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 이 상을 한국인으로서 수상한 뉴욕타임스(NYT) 최상훈 서울특파원이 내겐 꿈의 롤모델인 이유다. 지난 회에 잠시 소개했듯, 최상훈 기자는 AP통신에서 근무하다 노근리 사건을 조명한 기획 기사로 동료들과 함께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곧 NYT에 스카우트됐다. 퓰리처상 홈페이지에서 찾은 관련 기사와 사진들이다.
그런 최 선배가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던 때, 대신 NYT 서울지국장으로 부임했던 M 특파원(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생훈이 모르는, 새로운 취재원을 서울에서 발굴하는 게 나의 개인적인 목표야.” 약 1년 후, 서울을 떠나며 그는 말했다. “실패했어. 내가 아무리 새로운 취재원을 찾았다고 생각해도, 나중에 내게 다 이렇게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최상훈 특파원은 잘 지냅니까?’”
그런 최 선배는 왜 기자가 되고 싶었을까. 궁금했다. 물었더니, 저런, 애초에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는 답이 왔다. 다음은 해당 문답.
-한국어 매체에서 기자를 해보실 생각은 해보셨나요? 영어로 기사를 쓰는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애초에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 매체에 근무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연하게 영어 매체의 기자가 되었지만 외국인이 알 필요가 있거나 관심 있는 기사를 찾아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작성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나름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토종 한국인이라는 점이 NYT 입장에서 볼 땐 최상훈 선배의 주요한 스펙이었을 수 있다. 영어 기사 작성 실력이야 이미 입증됐고, 토종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한국을 전할 수 있으니까. 물론, 토종 한국인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뭐든지 적절히 어우러질 때 시너지가 발휘된다.
그래도 ‘토종’이면서 영어신문 기자를 한다고 하면 의혹의 눈초리를 먼저 받게 되는 세상이다. 나도 영어신문에서 8년 일하면서 그랬으니까. 혹자는 내게 “맨땅에 헤딩하시는군요”라고도 했었다. 최상훈 선배에게 물었다.
-‘토종’ NYT 기자라고 하면 한국인과 비(非) 한국인의 반응은 어떤가요?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NYT 기자라고 하니 으레 ‘한국계 미국인이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일부러 ‘저는 토종입니다’라고 말하진 않지만, 제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저에게 가끔 “어떻게 하면 영어로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질문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비 한국인은 ‘토종’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 이미 아시아계이면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워낙 많이 만날 수 있는 세상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오히려 비 한국인은 ‘토종’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아요”가 내 눈엔 확 들어왔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 “쟤 토종이래” “너 진짜 토종이야?”라고 묻는 건 항상 ‘동료 토종’들이었다. 외려 영어권 외국인들은 내가 입사 이전까지 국제선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최 선배가 주는 영어 공부 꿀팁은 뭘까. 이렇게 물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것만큼은 꼭 말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뭘까요?
“피아노나 테니스를 하루아침에 배울 수 없듯이, 영어도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영어를 성공의 수단으로만 보지 마시고, 언어로서 관심과 흥미를 가져보세요. 영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영어로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더 많은 고심을 해야 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 ‘영어=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다 보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자연스레 시간 투자를 안 하게 되고,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지는 게 대한민국 영어 학습의 악순환이다. 잘하고 싶다면, 비결은 간단하다. 좋아하면 된다. 안 좋은데 어떻게 하냐고?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면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영어로 공부하거나, 미국 연예인 중에서 누군가를 정해서 좋아해 보거나. 팬심만큼 외국어 공부에 훌륭한 도구도 별로 없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ㅋ
최 선배 말처럼, 영어도 피아노나 테니스처럼, 시간을 들여 집중해서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습득한 영어를 활용해 내가 어떤 콘텐츠를 세상과 나눌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발음만 좋다고 영어 잘하는 게 아니다. 콘텐츠가 중요하다.
최 선배의 노근리 사건 기사로 끝을 맺어보려 한다. 노근리는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대한민국 노근리에서 양민을 집단 사살한 사건이었다. 여러 이유로 쉬쉬했지만 최 선배의 기사로 본격 문제제기가 됐고, 피해자들은 늦었지만 나름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최 선배의 첫 문장은 이랬다.
It was a story no one wanted to hear.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기사도, 책도, 브런치 글도, 첫 문장이 중요하다. 독자들은 참을성이 별로 없다. 첫 문장으로 흥미와 의미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첫 문장, 어떠신가. 내겐 김 훈 작가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칼의 노래’)만큼, 아니 어쩌면 더, 훌륭하게 느껴진다.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숨겨져 왔던 이야기를 이 기사는 당신에게 전하려 한다는 메시지. 꿈에도 나오는 퓰리처상을 충분히 받을 만한 기사였다. 왠지, 오늘 밤에도 퓰리처 상이 꿈에 나올 것 같다.
P.S.: 여러분 덕에 ‘그래 나 토종이다’ 브런치가 10회를 맞았습니다. 영어 공부 팁, 또는 영어권 사람들과의 에티켓 등등에서 궁금한 점 있으시면 댓글 또는 e메일 등 어떤 형식도 좋으니 전해주세요. 앞으로의 연재에 반영하겠습니다. 당신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By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