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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ey Oct 29. 2023

'발라레 인생 3막: 무용수 이야기' 시작합니다.

들어가며

발레는 비(非) 인간적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니까요. 중력을 거스르며 돌고 뛰고 날아올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 발레입니다. 발레 작품 주인공들이 요정이거나 유령, 백조인 건 다 이유가 있죠.


성인이 되어 취미로 발레를 배운다는 건 겸허함의 무한 자동 충전을 의미합니다. 내 몸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연습실 거울을 보며 매초 자각하게 됩니다. 프로 무용수들은 그래서, 단순 호오(好惡) 아닌 깊은 경외의 대상이 됩니다. 매일 연습해도 꿈도 꿀 수 없을 것 같은 동작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해내는 그들은 신의 사자(使者)가 아닐까요. 발레의 절대적 아름다움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겐 주어지지 않아도, 무대 위엔 확존한다는 것을 무용수들은 증명합니다.

 


"쉬워지는 일은 없다. 더 잘하게 될 뿐." 무서운 발레 명언입니다. 구글링 하면 나오는 발레 관련 무료 이미지입니다.



살아간다는 건 외로운 고행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문득 시멘트를 비집고 나온 제비꽃의 낭창낭창한 아름다움, 하늘을 수놓은 폭신한 뭉게구름을 보면,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느껴지죠. 인생과 발레는 닮아 있습니다. 매일의 연습은 고행이자 수행이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건 존재한다는 걸 무대 위 무용수들은 보여주니까요.  


공짜는 없죠. 운이 좋아서 점프를 높게 뛰고 피루엣 턴을 많이 돌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발레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발레는 절대 운이 아니다(Ballet is never luck)." 운도 물론 중요하지만, 운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훼떼 32회전을 완수해 내는 발레리나와, 키만큼 날아올라 점프를 해내는 발레리노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온갖 피 땀 눈물을 대가로 흘려왔습니다.


재능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반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재능만으로도 부족하거든요. 발레는 매일의 클래스에서 실력을 제련해야 겨우 빛이 나는 예술입니다. 재능과 꾸준함은 기본, 여기에다 여러 행운도 따라줘야 합니다. 발레의 신은 까다롭고도 변덕스럽죠. 사실, 취미로 발레를 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듭니다. 이렇게 고된 일을 생업으로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미국 발레의 아버지 격인 조지 발란신의 명언. "뭘 그리 아껴? 다음에 한다고? 다음은 없어. 지금만 있어"라는 요지.


그래서일까요. 수년 간 20명이 넘는 스타 무용수들을 인터뷰해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이 예술가이기 이전에 수도자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발레라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온몸과 맘을 다해 표현해 낸다는 건, 자신의 불완전함을 계속 직면하고 수정하고 개선하는 고행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경외심은 더 커져갔습니다. 무용수들의 성별과 나이, 국적 등은 달라도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땀에 젖은 채 인터뷰 장소에 나왔다는 겁니다. 인터뷰 희망 장소는 연습실, 또는 바로 옆 공간이곤 했죠. 한 번이라도 더 쁠리에(plie)를 하려는 이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면면이 아닐 수 없네요.


이런 무용수들을 수년 간 기자로서 만나고 인터뷰할 수 있었던 건 행운입니다. 덕업일치, 맞습니다. 그 행운을 이제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려 합니다. 기사를 쓰긴 했지만, 이들이 꺼내놓은 이야기들을 지면에 모두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기사라는 글이 갖춰야 하는 형식과 독자의 대상 등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차마 녹이지 못한 무용수들이 들려준 이야기의 조각들을 아껴서 모아두었다가, 브런치북으로 엮습니다. 덕업일치의 행복을 나누고, 수도자 같은 무용수들의 면면을 전해지는 마음을 담아서요.




참, 그런데 왜 하필 발레냐고요? 세계는 넓고 좋은 운동은 많지만, 저에게 발레는 구원처럼 찾아왔습니다. 기자라는 꿈을 이룬 건 행복했지만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어깨와 허리, 손가락 통증이라는 불청객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때였죠. 취재원의 한 마디라도 더 듣겠다고 하루  번 이상 저녁 모임에 가고, 쪼그려 앉아 귀동냥을 하고, 매일 같이 노트북을 두드리는 생활을 하다 보니 몸도 맘도 천근만근이었습니다.


그러다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세 교정, 통증 완화"라는 문구. 홀리듯 발레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전까지 "보는" 것이자 "예쁜" 것이었던 발레는, "배우는" 것이자 "힘든"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저 더 잘하고 싶어 열심히 했을 뿐인데 체중은 빠지고 근육량은 늘더군요. 무엇보다, 삶이 즐겁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운데 재미있다니, 발레란 참 요상합니다. 


그렇게 저는 발치광이가 되었습니다.




연재의 첫 번째 주인공은 로베르토 볼레 무용수입니다. 눈이 번쩍 뜨이셨다면, 발레 팬이 확실하시군요. 볼레를 만나러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곧이어 발레계의 아카데미라 일컬어지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자인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 무용수가 출산 후 가졌던 마음가짐, 마린스키 발레단 김기민 무용수가 아침마다 하는 루틴, 국립발레단 박슬기 무용수의 부상 대처법 등등을 속속 공개합니다.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부 해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무용수 및 관계자분들과 조율을 거친 내용임도 밝혀둡니다. 무단전재 및 도용은 안 된다는 건 기본이겠죠.


저의 본진, 신촌 발레조아의 연습실 중 하나. 바닥의 수많은 스크래치는 말해줍니다, 우리의 노력을. By Sujiney


때론 취미발레를 하며 느끼는 바를 담은 에세이도 쉬어가는 코너도 마련했답니다. 전작 브런치북(발라레 인생 1막과 2막)도 함께 즐겨주셔도 좋겠습니다. 온전히 쉬는 유일한 날인 토요일에 브런치스토리를 쓸 수 있기에 때론 연재가 늦어질 수도 있다고 쓰려다,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마감은 힘이 셉니다. 마감을 지키고, 독자 여러분들과의 연재 약속을 지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상은 넓고 뛰어난 무용수들은 많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일부일 뿐, 지금도 많은 무용수들이 묵묵히 연습실에서 숨을 몰아쉬고, 비 오듯 내리는 땀을 닦으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용수들과, 지도자들과, 관계자들에게 찬사와 감사, 응원을 보냅니다.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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