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넘버 2 경영자였던 셰릴 샌드버그는 책 <<린 인>>에 적었다. "멋진 로켓에 탑승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해 봐. 망설일 필요조차 없이 '예스'라고 하겠지? 지금이 그 기회야."
그리고 그 말을, 나는 지난 3월 말, 광화문 한 카페에서 떠올리고 있었다. 5월 16~19일 국립극장에 열릴 발레 슈프림 2024의 프로그램북 글을 써줄 수 있겠냐는 요청을 받으면서다. 생업이 엄연히 있고, 1일 1발레 및 1일 1블로그 및 1주 1브런치스토리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완수하긴 어려울 게 불 보듯 뻔했다. 몸은 여전히 하나이니까. 그러나, 안 할 수 없었다. 내겐 로켓 탑승과 같은 기회였으므로.
쓴 글이 종이라는 물성으로 체화되는 것. 소중해. by Sujiney
김기민, 프리드만 포겔, 다닐 심킨, 레나타 샤키로바, 토마스 칼보그 등. 이들이 서울에서 올리는 공연에 뭐라도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어떤 무리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업무 후 작품해설과 인터뷰 글 작업. 무용수들의 사정으로 인해 이미 쓴 글이 무용지물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영원한 오네긴, 프리드만 포겔 수석무용수 인터뷰. by Sujiney
개인적으론 파리오페라발레단 도로테 질베르 수석무용수와 기욤 디옵 수석 무용수의 내한 불발이 참 아쉬웠다. 질베르 무용수는 내한 직전 파리 무대에서 '지젤' 공연 중 부상을 입었고, 디옵 수석의 경우는 다양한 설이 나돌지만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의사가 장거리 비행을 말렸다는 것.
디옵 수석은 특히나 서울에 오고 싶어 했다. 자신이 발레단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로 깜짝 승급을 한 것이 지난해 서울 '지젤' 내한 공연이었기 때문. 질베르 수석이 인터뷰에서 직접 들려준 이야기다. 결국 두 무용수 모두 부상으로 못 오게 됐지만. 쾌유해서 다음 기회엔 꼭 서울 무대에서 볼 수 있기를.
질베르 수석과 디옵 수석에 이어, 다른 불가측 상황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불만을 가질 여유 따윈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
괴롭다고 생각할 시간에 대책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나의 경우는 업무시간 이외에, 무보수로(내가 요청한 조건이다) 응했기에 더욱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고 효율적=대충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삶을 지탱해 준, 지탱해 줄, 발레의 세계적 스타들이 모여 올리는 공연이다. 그 공연이 나를 필요로 한다. 발레의 신에게 은혜를 갚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오버일까.
김기민 무용수와의 인터뷰. by Sujiney
프로그램북을 쓰면서 스스로도 성장했음을 느낀다. 특히 이번 공연엔 직접 관람한 적이 없는 현대 발레도 두 작품이 있었으니, 'Trois Gnoisseness'와 'The Owl Falls'. 본 적이 없는 작품의 해설을 쓴다는 건 꽤나 도전이었다.
알지 못하면 잘 쓸 수 없다. 우선, 기자를 하면서 갈고닦은 모든 기술을 동원해 자료를 모았다. 방법론은 영업 비밀이지만, 어찌어찌 신빙성을 갖춘 자료를 꽤 모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쓴 게 아래의 내용. 프로그램북을 직접 촬영했다.
익숙한 작품들도 쉽진 않았다. '돈키호테'와 '오네긴' 등은 직접 관람한 것만 10회를 훌쩍 넘기지만 막상 작품해설을 쓴다는 건 다른 이야기. 공부가 됐다.
사실 '레이몬다'와 '르 팍' '차이코프스키 파드되' 같은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워낙 최애 작품 중 하나가 '르 팍'이어서 혼신의 힘을 들여서 작품해설을 썼지만, 이 작품은 1막의 서프라이즈로 바뀌었기에 역시, 눈물을 머금고 프로그램북엔 미게재. 대신 나중에 공개할 기회를 만들 예정.
공연 당일, 로비에 모여든 관객들이 프로그램북을 읽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무보수를 자청한 대신 공연 기획 측의 제안으로 백스테이지도 가볼 수 있었던 건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성장할 수 있어 행복하다.
물론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른다. 업무시간을 축내지 않고, 업무에 소홀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 본업을 더 열심히 했다. 주 6.5일을 석 달 정도, 연휴도 없이 계속하다 보니 몸이 축났다. 코피가 자주 터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발레 클래스를 들을 때.
선생님들께 전하고 싶다. 제가 순서를 틀린 건 발레 슈프림 때문이에요,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회사에선 괜한 오해도 샀다. 발레 기사를 네가 다 쓰려고 하는 거냐,라는 오해 등등.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지. 회사 화장실에서 울면서 생각했다.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러나 보다.
이런 다단한 일을 거쳐 지난 16일부터 나흘간 국립극장에 오른 '발레 슈프림 2024.' 모든 무대를 때론 객석에서, 때론 백스테이지에서 지켜보면 생각했다. 하길 정말 잘했다고. 이건 내게 실제로 로켓 탑승과 같은 일이었다고.
후회 없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자주 있기를.
덧 1) 네이버에 '연희동 기자리나'를 검색하시면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 있는 건 안 비밀. 덧 2) 공연 프로그램북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주저하지 마시고 sujiney@gmail.com 으로 연락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