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내 영어와 일본어의 팔 할은 그 언어로 잘 놀았던 덕이다. 물론, 소위 ‘토종’이 영어로 취재하고 기사 쓰며 10년 가까이를 보내고, (진땀깨나 흘렸지만) 일본인 학생들에게 일본어로 북한을 강의하기까진 나름 시간이 걸렸다. ‘토종’ 외국어 고수가 강호엔 이미 차고 넘친다. 그러나 굳이 이 글을 적는 이유. 영어로, 일본어로 열심히 놀았던 기억을 나누고 싶어서다.
“외국어 공부 어떻게 하면 되냐?”는 질문.
내 답은 정해져있다.
“좋아하면 돼요” or “그 외국어로 놀아보세요.”
되돌아오는 건 “너 지금 나 놀리냐”는 썩소.
하지만 정답은 파랑새 같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어린 시절 해외여행이나 연수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내겐 다양한 텍스트가 있었다. 성문종합영어와 같은 교과서도 필수, but 무엇보다 Bon Jovi와 Jane Eyre가 있었다. 본조비를 들으면서 가사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고, 본조비의 영어 인터뷰를 찾아 읽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Jane Eyre 역시 삼중당 문고판을 넘어 펭귄 클래식을 직접 읽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다 보니 영어는 내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이 됐다. 일본어야 뭐 100퍼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 덕질 덕이고.
이 오빠 보려고 야자 땡땡이도 쳤었는데, 세월이 무상...ㅠ [본조비 한국 페이스북 팬페이지]
요즘엔 이탈리아어를 공부 중인데(역시나 덕질 때문에, 누구긴 누구야 미켈레 모로네), 최고의 교재는 넷플릭스에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셰프의 이야기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소금 산(酸) 지방 불’도 있고, 이탈리아어를 배우러 로마에 간 줄리아 로버츠를 볼 수 있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다’도 있다.
미켈레 모로네 인스타. 악성루머도 많지만 뭐 내 남편 할 것도 아니고. 커버 사진도 from 미켈레 인스타.
그런데, 여기서 잠깐. 꼭 외국의 텍스트를 빌려와서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작금의 21세기는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다. 우리네 드라마와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켜놓고 본다면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드라마도 보고 영어도 공부하고 일석이조다. 배우 송중기가 대사를 읊는 장면을 보며 영어 자막을 켜놓을 수 있다니. 바로 이렇게. 올해 상반기 화제작 중 하나로 기억될 넷플릭스 오리지널 ‘승리호’ 중 한 장면이다.
'승리호'의 송중기. [넷플릭스 캡처]
게다가 넷플릭스는 글로벌 플랫폼인 만큼, 영상 번역에 있어서 꽤나 질적 양적으로 모두 공을 즉, 돈을 들인다. 오죽하면 영국의 유명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3일(현지시간) 온라인에 게재한 기사 제목은 이렇다. ‘넷플릭스가 유럽 공통의 문화를 만드는 방법.’
유럽 대륙은 EU라는 공동체로 묶여는 있지만, 프랑스어부터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언어장벽이 높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적어도 문화 콘텐츠의 장벽만큼은 허물고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 중 하나. 이게 가능했던 핵심 이유는 역시, 자막이다.
한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제목의 영화가 인기였다. 원제는 '통역에서 길을 잃다(Lost in Translation)'.
But 적어도 21세기 콘텐츠 플랫폼에선,
사랑도 번역이 된다.
한국이 제작한 여러 오리지널 콘텐츠 중에서도 기실 제일 재미있게 본 건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다. 개그우먼 박나래는 최근 유튜브에서 수위를 넘는(다고 일부에서 지적받은) 콘텐츠로 자성 중이지만, 넷플릭스의 이 19금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만큼은 훨훨 날아다닌다. 성적 농담을 이렇게나 차지고 밀도 있게 풀어내는 여성 개그우먼이 대한민국에 또 있었나 싶을 정도.
'박나래 농염주의보' 캡처. 영어자막과 보면 재미 2배! [넷플릭스 캡처]
이 콘텐츠의 숨은 공신은 사실 영어 자막 번역자들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폭음을 하지 말라고 보냈다는 장문의 편지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 참고로 박나래는 이 편지를 전 남친에게 받았다고 한다 이상한 놈일세 그려.
조선 후기 실학자가 쓴 편지를 21세기 우리들이 핸드폰에서 손가락 하나로 영어자막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인 셈이다. 놀고 공부도 하고.
영어 자막 번역자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넷플릭스 캡처]
이 뿐인가. 한국이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및 영화는 앞으로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무엇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작은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비주얼 정우성 배우가 감독한 ‘고요의 바다.’ 배우진도 배두나부터 공유 등, 훌륭하다.
'고요의 바다' 공개 스틸컷. [넷플릭스]
여기에다 외식 사업가 백종원이 한국의 술과 음식 문화를 소개하는 ‘백스피릿’도 지난해 12월 제작 계획을 공개했다. 한국 특유의 식문화가 어떤 영어자막으로 소개될지 벌써부터 궁금.
넷플릭스가 2019년 공개했던 ‘길 위의 셰프들 – 아시아 편’에서 서울 광장시장의 칼국수 집과 빈대떡 등을 소개하며 트로트를 틀고, ‘한(恨)’이라는 정서를 소개했던 것도 추천. 그러나 이 콘텐츠는 역시 해외에서 한국을 들여다본 것이라 한계가 있었다. 한국 제작진이 만든 ‘백스피릿’은 깊이가 더하기를 기대해 봄.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다. 영어 공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머리를 싸맬 게 아니라, 핸드폰을 켜자. 그리고, 보자.
놀면, 배운다.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