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만 켜고 지낸 예전과 에어컨에 의지하는 지금
셋방 문턱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흰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농협 부채를 부친다. 어린 나는 동생과 부엌에서 등목을 한다. 혹은 고무통에서 첨벙거린다. 골드스타 로고가 새겨진 철제 선풍기를 강풍으로 튼다. 선풍기를 코 앞에 당겨놓고 센 바람을 맞으면 도로 얼굴이 미지근해진다.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살포시 낮잠이 든다. 방에 깔린 대나무 자리는 살짝 달라붙지만 서늘해서 기분이 좋다. 일어나면 어깨와 팔다리에 줄자국이 남지만. 데굴데굴 구르면서 만화잡지 <보물섬>을 펼친다. 동아전과, 표준전과는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좋아하는 연재만화가 두꺼운 쪽수 어디에 있는지 차르륵 펼쳐본다. 아! 이번 달 휴재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맞바람이 불어 목덜미와 뺨을 뽀송하게 식힌다. 스텐 국그릇에 미숫가루 두 숟가락 떠 넣고 설탕도 한 숟가락 섞는다. 반죽이 엉기지만 계속 젓는다. 얼음 4조각쯤 띄우면, 호로록 한 모금 빨아들이기 딱 좋게 묽어진다. 설탕가루가 씹히면서 단맛이 진하게 퍼지면 더 좋다. 선풍기 한 대로 다섯 명이 단칸방에 살았다. 내 쾌적한 기억 속 엄마는 여름에도 연탄불에 밥 짓느라 가장 바쁘고 더우셨을 것이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일본 드라마를 보면 유리창이나 처마 쪽에 매단 풍경 소리가 들린다. 드라마 <수박>이나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 <호타루의 빛>에서 등장인물들이 고민했던 문제가 풀리거나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 그 맑은 방울소리가 도로롱 울린다. 성장이 이루어지는 조용하고 치열한, 눈에 보이지 않는 활기를 소리로 표현한 것 같다. 20대에는 내내 혼자 지냈다. 열기가 땀방울로 바뀌어 흘러도 그 느낌을 즐겼다. 느리게 움직이는 고양이와 선풍기 두 대로 여름을 보냈다. 탁상용 선풍기가 추가된 것.
여름에는 밤을 지새워도 외롭지 않았다. 일부러 새벽노을을 보기 위해 기다린 날도 있다. 어두운 바다색일 것 같았는데 날이 밝아오는 쪽 하늘은 용암이 뿜어져 나온 것처럼 정열적이었다. 여름은 가장 젊은 계절 같다. 그리고 가장 혼란스럽다. 왜 그랬을까? 학생일 때는 졸업을 미룰 것인지 갈팡질팡했고 직장에 속할 때는 성과를 뚜렷이 내려고 조바심 냈다. 그러나 여름은 풋내기의 불안을 지그시 누르는 힘이 있었다. 더울 때는 차근차근 행동해야 한다. 쓸데없는 생각이 팝콘처럼 튀는 것을 진정시키고.
인도네시아에서 지낼 때는 에어컨에 갇혀 지냈다. 에어컨은 24시간 가동되었다. 한국의 여름과 다른 냄새가 났고 사계절이 없는 열대지역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달랐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 같은 날처럼 늘 여름이므로 인위적으로 시간 흐름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았다. 물론 바쁜 걸음으로 이동 중인 것은 아니다. 얇고 반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곁에 내려놓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오토바이로 가득한 좁은 도로 양쪽에서 쉬고 있었다. 묘하게도 열대 기후가 익숙해지면 더운 날씨에도 한기를 느끼는데, 같은 이유인지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점퍼를 걸치고 있다. 요령 없이 급하게 움직이면 생명이 단축될 것 같은 더운 공기는 새벽 무렵 청량하게 바뀐다. 이슬람 사원에서 퍼져 나오는 '아잔'소리와 함께. 그래서 새벽 5시에 친목 행사를 시작하고, 아침 7시면 학생들의 등교가 이미 끝났다.
그렇게 열대지역 여름은 매캐한 오토바이 연기와 길거리 음식점에서 풍기는 닭고기 양념 냄새와 함께 저장되었다. 내 피부도 갈색으로 노릇하게 구워지고 매운 고추가 들어간 삼발 소스에 입맛이 길들여졌다. 그리고 열대 과일에 깃든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비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 홍수가 지느냐 아니냐로 날씨를 구분했다. 비구름이 우르르 섬찟하게 몰려오면 우산으로 막을 수 없는 거센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돌아다니면 안 되었다.
다시 우리나라에서의 여름이다. 나고자란 곳의 날씨와 음식은 건강에 미묘하게 영향을 준다. 땅과 하늘과 사람의 몸은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져있나 보다. 그래도 커피는 인도네시아 콩이다. 커피콩 가루 내는 통 손잡이를 잡고 드드득 돌린다. 펄펄 끓은 물줄기가 서늘하게 식은 공간에 예리한 생채기를 내면서, 부어오른 커피가루를 조르륵 통과하는 소리가 들린다. 에어컨에서 적당히 거리 둔 자리에 앉아, 선풍기는 약한 미풍으로 해놓고 하얀 머그에 담긴 아주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여름은 한 달 후면 지나갈 텐데 내내 머물 것만 같다. 이렇게 계속 에어컨을 켜놓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