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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May 08. 2023

오디오북에 빠졌다

사람, 불가항력, 그리고 소통

 어릴 때부터 책을 꾸준히 읽었다. 무협지부터 시작했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아리랑이나 태백산맥 같은 역사소설을 지나 ‘사람’에 대한 인문학 도서들을 읽어왔다. 편협하게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책이 또 다른 책과의 만남을 주선할 때가 있다. 여느 소개팅이 그렇듯,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애프터는 없다. ‘오호, 이런 책들도 있단 말이지.’하는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소개 받은 책들을 만났을 때, 그 두께와 폰트와 복잡한 목차, 무엇보다도 인사말에서 느껴지는 도저히 범접 불가의 (다양한 의미에서의) 거리감은 나를 재빨리 도망치게 했다. 학점이 3점대에도 못 미칠 때에도 책과 영어는 옆에 두었다. 너무 실용적이었던걸까? 앞날을 내다본 혜안이 있었던 걸까? 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지금도 대학시절 성적표를 볼 일이 있을때면 혼자서 민망한 듯 웃다가도 수업 빼먹고 잔디밭에서 책읽다가 잠들어버린 기억에 기분좋게 웃어 넘긴다.


 그런 내가 30대 중반이 넘어 살기 시작한 이국 생활에서 조금씩 책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의도적인가? 라고 자문해보면, 중립적이란 답만 나온다. 먹고 살기 바빴다. 6년 동안 먹고 살려고 해온 이사짐 일을 지난 주로 그만 두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부터 페인트라는 (도대체 몇 번째인지 세기도 귀찮은) 또 하나의 직업을 추가했다. 그렇게 빡센 삶은 어릴 때 많은 외부 변수를 물리치고서라도 붙잡았던 책에 손을 두기에는 넘긴 힘든 벽이었다.


 40대가 되어서 이런 저런 주제들에 이끌려 다시 책을 해외배송하기 시작했다. 이민 가방 쌀 때 가지고 온 전공 서적에, 인문 도서들이 꽤 되었다.이사 가 본 사람들은 알거다. 이 책들이 평소에는 친구같은 ‘분’이지만, 이사 갈 때는 원수같은 ’놈‘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그런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2년 정도 읽었나? 42살 즈음부터 이상 기운이 감지되었다.


‘왜 이러지? 뭐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한 문장을 몇 번씩 읽어도 이해가 안 되었다. 글자가 명확하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는 맥락에서 겉도는 내 자신을 보며 며칠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아… 올게 왔구나.’


  노안이 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더 심해져서 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하던 광경, 안경을 위로 들어올려서 글자를 읽거나 머리를 아래로 숙여 안경 너머로 활자를 확인하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다. 가슴 아프지만, 어쩌랴.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마냥 순응해버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나의 근시안이 큰 영향을 끼쳤다. 눈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음을 알았지만, 크게 대수겠는가 하면서 별생각 없이 전자책 서비스를 신청해버린 것이다. 아이패드로 한국의 신문물(?)에 감탄하며, 이런 저런 책들을 저장하고, 다운받고, 읽고 하다가 결국은 노안이 아닌 노인이 되겠다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대책을 마련하자.’


 이쯤 되면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으셨던 분들은 몇 가지 옵션을 생각해낼 것이다. 나의 경우, ‘오디오북’이었다. 이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은 이미 한 달 전이었다.이미 편집자님들께서 친절히 안내 메시지를 남겼지만, (이전 ‘편집자는 편집자다.’ 글에서 남겼던 것과는 달리) 영주권이라는 해외 이민자들의 가장 큰 목표를 앞둔 나의 바쁜 생활을 바꾸지 못 하였다.(죄송합니다… 편집자님들^^;;) 오디오북, 그것은 신세계였다. 이 글의 큰 맥락을 남길 수 있었던 때에도 박정민 배우가 직접 녹음한 자신의 책,  <쓸 만한 인간>을 듣던 중이었다.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머리 속에서 글들이 뛰어나오는 순간, 안 쓰고는 배길 수 없는 놀라운 순간 말이다. 그렇게 갑자기 후다닥 메모를 해치웠다.전자책 서비스 구독 1년만에 눈이 시리고 사물이 흐려 급속도로 시력이 안 좋아지고 난 후, 나는 3개월 이상 책을 읽지 않았다. 아이들이 읽는 마법 천자문의 권수만 늘어가던 시점이었다. 이전에 박정민 배우가 출연한 영화 몇 편을 보면서, 송강호 배우나 강하늘 배우 이후로 오랜만에 ‘저게 생활 연기지.’하는 느낌을 받았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쓴 텍스트에 자신의 목소리와 갬성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소리는 책을 읽지 못 하고 있던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귀에는 박정민 배우가, 입으로는 대한항공이 이 높은 하늘에서 나를 만족시켜주고 있다.(지금은 내 집이 있는 땅이다^^;;)


 누구나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가 있는 것 같다. 아닌 사람도 있을까? 라는 반문으로 나의 문장에 소심하게 보험을 들어보기는 하지만, 한 번 더 소심하게 이 말에는 예외가 없음을 전제하여 살포시 쓴다. 자연이나 건강의 문제는 일단 터지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오롯이 받아들여 책임을 지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때그때 처하는 현실이 주는 압박과 개인적인 욕구들이 어우러져 발목 잡히게 되어 예상은 되면서도 준비하는 수고는 피하고 싶고, 게을러져 결국에는 책임을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요 며칠 생각나는 이 말은 미리 준비하는 수고를 피하고, 내 욕구가 먼저인 나에게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활자 책이 읽기 힘든 나에게 오디오북이 찾아온 것처럼.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 하게 된다.(헬렌 켈러)


 미련이 없을 수 있을까? 후회와 미련과 자책은 늘 우리 삶을 따라 다닌다. 그런데, 내 발목을 내어줄지 말지는 결국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걔들은 따라 다니는게 일이다. 매번 후회하라는 법도, 미련이 남으란 법은 없다. 자책할 수 밖에 없는 경우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도 그렇게 원했던 문이 하나 닫힐지 모른다. 너무 부정적인가?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향해 열린 문은 어디인지 꽂혔던 시선을 얼른 다른 곳으로 둘러본다. 오늘 하루도 열린 그 문으로! 시원하게 들어가시길 바란다.


20230420 20:41 비행기 안에서 ~ 20230508 10:37 집에서


p.s - 읽으실리는 없겠지만, ‘박정민 배우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디오북 녹음 정말 맛깔나게 잘 살리셨습니다. 옆에서 얘기하는줄요ㅎㅎㅎ

  

*사진 Photo by <a href="https://unsplash.com/@aaronburden?utm_source=unsplash&utm_medium=referral&utm_content=creditCopyText">Aaron Burden</a> on <a href="https://unsplash.com/s/photos/audio-book?utm_source=unsplash&utm_medium=referral&utm_content=creditCopyText">Unspla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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