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의 손을 잡고 당시 우리가 살던 동네 우물가 공터로 이동했다. 공터에는 당시 함께 놀던 친구들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며 뛰어놀고 있었다. 신디는 정식이네 집 대문 댓돌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좀 이상했다. 집으로 가자고 했는데, 왜 집 앞에서 멈춰 있을까?
"신디야, 저 위가 우리 집이야. 집에 같이 가볼래?"
신디가 내 손을 잡고 일어서서 엉덩이를 툴툴 턴다. 나는 신디의 손을 잡고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산아래 첫 집, 작은 셋방으로 함께 갔다. 신디는 방안을 기웃기웃 거리며 돌아보기는 했지만, 정작 들어가지는 않으려 했다.
"신디야, 이집이 아니야? "
신디는 입을 앙다물며, 여기가 아니라는 의사표시를 해왔다. 즉시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딘지 떠올랐다.
"신디야, 그럼 지금 내가 사는 집으로 갈까?"
말이 끝나자 무섭게 신디와 나는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지리산의 집 입구에 섰다. 오월의 햇살이 따숩게 내리쬐고, 화단에는 여러가지 꽃이 피어 있는 우리집 마당이다. 신디는 집 입구에서부터 춤을 추며 좋아했다.
신디가 이곳으로 오고 싶었한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신디는 어린 시절 고통받던 그 집이 아니라, 꿈이 이루어진 곳으로 오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넓은 땅에 지어진 우리들의 집.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만족해하는 집. 마당엔 너른 텃밭과 화단도 있고, 노랗고 붉은 장미가 환하게 웃는 집. 어린 시절 신디가 꿈꾸던 집이다.
초등학교 5-6학년때 일이 떠올랐다. 나는 밤마다 우리 집의 설계도를 그렸다. 방이 여러 개여서 식구마다 한 명씩 쓸 수 있는 집, 수세식 변기가 있고 소파가 있는 그런 집을 꿈꾸며 방의 도면을 그렸다. 은지네 집에서 받은 충격을 나름의 방법으로 해소하는 그런 시간이었던듯 하다. 그 꿈을 잘 알아차리고 키웠다면 건축설계사가 되었겠지만, 내 꿈은 우리 집이 부유해져서 넉넉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어서 건축설계사는 되지 않았다. 대신 농사를 지으며 작은 사업을 일구는 농부 사업가가 되어 내 집을 짓고, 마당을 가꾸며 신디의 꿈을 이룬 것이다.
신디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춤을 추듯 좋아하더니 곧장 거실에 대자로 누워 손과 발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좋아다. 나도 신디처럼 큰 대자로 누워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신디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신디야, 너는 이미 성공했어! 너는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었어.
이 모든 것이 다 너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야.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신디야.
이제 너에게 예쁜 옷도 입혀주고, 맛있는 음식도 항상 잘 챙겨줄게. 너를 평화롭게 해 줄게.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네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고, 네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게.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네가 건강하게 잘 살도록 너를 도울게."
신디에게 과자로 만든 것 같은 작은 집을 지어 주었다. 그곳에서 하얀색 나시 원피스를 입은 신디가 밝게 웃는 얼굴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책이 가득한 높은 책장에서 책을 뽑아 읽기도 한다. 머리에 화관 같은 핀을 꽂는 날도 있다. 모두 다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모습들이다. 나는 가끔 신디와 마주 앉아 신디를 바라본다. 신디의 기분도 살피고 함께 깊은 포옹도 자주 한다. 뭔가 답답한 일이 있을 때면 신디와 상의도 한다.
그렇게 신디를 만난 이후 내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성공했다는 감각을 갖게 된 것이다. 객관적으로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 같은 것이다. 더 바라고 이루려하는 욕구가 가라앉은 느낌. 그 감각이 생기고 보니 그동안 나는 항상 뭔가가 부족하고 결핍되어서 더 찾아야 할 것 같은 불안과 갈애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것이 알아차려졌다. 그 갈애로 인해 감사함이 없었고, 충만함과 만족감을 알지 못했다.
막상 그 갈애가 사라지고 나니 삶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남편에게도 고맙고, 직원에게도 고맙다. 우리 제품을 구매해 주시는 고객들에게도 감사하다. 이른 아침 새소리에 눈뜨는 것이 감사하고, 마당에 꽃도 이뻐보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다보면 풀냄새 꽃냄새 가득한 지리산 자락의 숲 속에 살 수 있게 된 지금에 감사함이 느껴진다.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충만과 감사함이다.
운동도 시작하고, 생활의 루틴을 만들어 내 삶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법화경 기도와 모닝페이지 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상림 맨발 걷기를 했다. 좋아하던 맥주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다.
우연히 '가족세우기'라는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도 시작했다. 사업을 더 잘해야한다고 믿으면서 쫒아다녔던 마케팅 강의들은 모두 끊었다. 갈애로 인해 쫒아다니기만 했을 뿐, 정작 실행은 하지 못했던 공부들이다.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대신 이루어지는 대로 이루겠다는 평화가 자리 잡았다. 내면아이와 연결되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료해지는듯 하다.
내면아이 신디와 만난 이후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모든 변화의 시작이 거기서 비롯되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의 결정장애와 게으름과 미루기와 불안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적 정체 혹은 지체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 안에서 또 다른 내면아이도 만나고, 그럴 때면 신디와 함께 그 아이의 치유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삶이 조금씩 더 가벼워진다는 것을 충만하게 체험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지금도 나는 신디와 함께 마음의 성장, 영혼의 성장을 위해 책을 읽고, 공부하고 이렇게 글을 쓴다. 혹여 어떤 감정, 느낌,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다면 재빨리 치유모드로 전환해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난다. 그래서 쉽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에 혹사당하지 않고, 감정에 속지도 않으며 회복 탄력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 내 영혼의 매트릭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디들과 연결됨으로 인해 나는 나를 존중하며 성장하고 변화하고 감사함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안에 영혼의 매트릭스가 존재한다. 그곳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내가 현재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현재는 과거가 만들어낸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가 나인줄 알고, 전부인줄 알고 산다.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과거의 에너지에 휘둘리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살기 십상이다. 내 안의 매트릭스를 발견하는 것, 그 안에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발견하는 것,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통합되어 원초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면아이 치유의 목적이 아닐까 한다.
신디를 만나 치유할 때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즉각적인 알아차림과 통찰로 나를 치유한다. 신디를 만난 이후 내면아이 책도 읽고, 심리치유 책들도 읽은 덕분이다. 특히 버트 헬링거의'가족 세우기' 프로그램을 만난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 가족 세우기를 통해 나는 더 다양한 내면아이들을 만나고 치유해 왔다.
앞으로는 가족세우기를 통해 만났던 다양한 나의 내면아이들과 그 치유과정을 공유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