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소를 참 좋아한다. 방안을 깨끗이 치우고 나면 삶이 환기되고 새로운 의욕이 고취된다. 어려서부터 주말에 날을 잡아 집안 대청소 하기를 즐겨했다. 그런 날이면 장롱 위에 묵은 먼지까지 깔끔하게 닦아내고 혼자 뿌듯해했다.
나는 요리하기도 참 좋아한다. 뭐든 뚝딱 만들면 참 맛있다. 이렇게 저렇게 응용하는 것도 잘해서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남편은 내가 만든 음식은 뭐든지 다 맛있다며 이상하게 조합된 음식마저도 맛있게 먹어준다. 내가 살림을 참 잘한다고 착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나도 싫어하는 것이 있다. 설거지. 나는 설거지를 참 싫어한다.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통에 그릇을 쌓아 놓았다가 더 이상 쓸 그릇이 없을 때, 그제야 몰아서 설거지를 하곤 했다.
오랫동안 가정부에게 살림을 맡기셨던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 다르다고 한다. 누군가는 청소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설거지를 잘하고, 누구는 요리를 참 잘한다고. 세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며 설거지를 고민하는 내게 위안을 주셨다. 맞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일을 다 잘하랴. 나는 청소와 요리는 좋아하지만, 설거지하기는 싫어하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설거지는 우리 부부의 중요한 갈등 이슈가 되었다. 설거지를 미루는 나를 남편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자기가 설거지를 해주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때때로 씩씩대며 분노의 설거지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부부의 가사분담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지적질이었고 화풀이였고, 본때를 보여주는 설거지여서 뒤통수가 미운 설거지였다.
남편이 그렇게 설거지를 한 날이면 나는 뭔가 죄를 지은듯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에게 엉뚱한 공격을 퍼부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둘이 같이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들어왔음에도, 설거지가 쌓여 있는 것은 언제나 내 책임이 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왠지 슬프고 우울해졌다.
"설거지 아직도 안 했나?!"
"설거지 언제 할 거고? 숟가락 쓸 것이 하나도 없다."
"저리 비켜라. 내가 할게! 넌 딴 일 해라"
앵돌아진 남편의 외침을 들으며 남편의 등뒤로 밀려 서서 설거지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나도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설거지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이다. 설거지는 언제나 미뤄야 할 일이고 닥쳐서 어쩔 수 없어하는 일이지, 내 일로 여겨지지가 않았다.
남편이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가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설거지해야 하는데... 남편 오기 전에 설거지해야 하는데... 남편이 돌아와 화를 내면 어쩌지?'
희한한 것은 그러면서도 막상 설거지는 하지 않고 미루고 미루고 미룬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설거지, 설거지, 설거지'가 쫓아다니지만,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설거지를 회피했다. 설거지를 미루면서 하루에 12시간씩 설거지에 매달려 살았다. 5분이면 할 설거지를 12시간씩 끙끙대며 끌어안고 살았다.
어느 여름날, 뜨거운 태양이 부엌의 서쪽 창문으로 떠밀고 들어와 눈살마저 찌푸려지던 오후에 한 시간째 땀을 뻘뻘 흘리며 밀린 설거지를 하다가 불현듯, 질문이 올라왔다.
"나는 왜 이렇게 설거지하기가 싫을까?'
처음으로 하는 질문이었다. 어이없게도 왜 싫어하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다. 그저 어려서부터 하도 많이 해서 지겨운 것이려니 했을 뿐 그 원인을 따져 볼 생각은 못했다.
질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질문 한마디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순간,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지며 내가 왜 설거지하기를 싫어하는지, 그 이유가 알아진 것이다.
'아, 아버지.'
어두컴컴한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울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어린 내가 보였다. 분하고 속상한 눈물을 흘리며 밤색 고무대야에 대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어린 경아. 그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 내가 왜 설거지를 싫어하는지, 왜 설거지를 미루는지 한큐에 이해가 되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떠오른 사람. 나를 아프게 하셨던 아버지. 그날 흘린 눈물의 의미는 아버지로부터 공감받지 못했던 어린 소녀의 상처받은 눈물일 것이다.
4남매 중 장녀였던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 청소와 설거지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이른 아침 장사를 나가신 엄마 대신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마친 후 동생의 손을 잡고 등교를 했다. 저녁에도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면 피곤한 엄마를 대신해 설거지는 당연히 내 몫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식언이 들기 시작하면서 설거지를 둘러싼 아버지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칼라 TV가 시작되었던 때라 저녁밥 먹으며 보던 드라마를 마저 보느라 밥상 치우기를 미루고 있으면 여지없이 아버지의 매서운 호통이 이어졌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나를 칭찬해 주신 적이 없는 분이셨다. 특히 설거지가 원흉이었다.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시작한 것도 설거지 때문이었다. 나는 그토록 매몰차게 몰아붙이시면서도 나보다 네 살 아래인 여동생이 설거지를 하면 어찌나 살갑게 칭찬을 하시고, 나 보란 듯이 이뻐해 주시는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너무해요. 왜 나는 9번 하고 1번 안 하는데 혼을 내고, **는 9번 안 하다가 1번 하는데 칭찬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혀를 차대며 '저게 뭐가 될라고 저렇게 한심한 지 모르겠다!'며 어이없어하셨다.
하기 싫은 설거지도 설거지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거나 공감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심한 아이, 게으른 아이로 지목받아 어린 동생과 비교까지 당해야 했으니, 그 수치심과 상실감 때문에 어린 경아가 받는 상처가 더 컸으리라.
울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노라면, 얇은 합판 문 너머로 마루에 모인 온 가족이 tv를 보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만 외톨이처럼 느껴졌다. 연탄아궁이가 놓여있고 작은 부뚜막이 전부였던 그 부엌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쥐도 자주 출몰해서 뒤로 자빠지게 놀라기도 여러 번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컴컴한 부엌에 나의 내면아이가 머물러 있다. 그때의 그 느낌, 감정, 생각으로 여전히 설거지 하기 싫은 마음, 설거지를 미루고 싶은 마음을 반복재생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고3이 되는 날, 나는 비로소 더 이상 설거지를 하지 않겠다고 온 가족에게 선언했고, 설거지는 당시 중학생이던 여동생에게 물림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설거지로부터 벗어났고. 그것이 내 삶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에게 설거지는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분노였고, 아버지의 화풀이였다.
나에게 설거지는 인정받지 못함이었고, 칭찬받지 못함이었다.
나에게 설거지는 억울함이었고, 진짜 진짜 하기 싫은 일이었고, 내 존재감을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나에게 설거지는 무섭고 원망스럽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무거운 일이다.
나에게 설거지는 억울했던 어린 나를 다시 만나는 두려운 일이다.
나에게 설거지는 존중받지 못했던 그 시절에 갇히게 하는 수치심이었다.
결혼 후, 남편이 아버지를 대신했다.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듯 남편 눈치를 살피며 '설거지 공포'에 빠져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맞다. 설거지 공포. 나는 설거지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모르고 자책만 하고 살았다. 그걸 모르고 내가 게을러서 설거지하기를 싫어하는 줄만 알았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 이해되었다. 주르륵주르륵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내면아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던 때여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곧장 식기 세척기 서칭을 시작했다. 가정용은 사이즈도 작고 한번 세척하는 데 60분이나 소요된다고 해서 아예 식당용으로 재빠르게 결재를 했다. 나를 위한 결재는 재빠르게를 외치며. 대용량으로 빠른 설거지가 가능한 식당용 식세기가 내 맘에 딱 들었다. 3상 전기와 연결해야 해서 사용하는 데까지 시간이 소요되었고, 초벌 세척은 여전히 손으로 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이라고 뿌듯해하고 있다.
내 안에서 솟아 올라온 위대한 질문을 통해, 설거지에 얽힌 스토리들을 발견해 낸 것은 기특한 일이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원망을 치유하지는 못했어도,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여전히 곧장 곧장 설거지하기는 잘 안되지만 미루더라도 전처럼 불안과 초조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설거지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설거지를 하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밥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5분에서 10분이면 되는 일인데, 그동안 나는 밥 먹고 그다음 밥 먹을 때까지 12시간 이상 '설거지를 하면서 살았구나 하는 것이 알아졌다.
남편도 바뀌었다. 설거지에 얽힌 나의 공포와 알아차림을 전해 들은 남편은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다며
'그 어린애가 설거지하기가 얼마나 싫었겠노?!' 라며 위로까지 해주었다. 이제는 설거지가 미뤄져 있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본인이 하거나, 내가 시간 내서 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설거지를 하더라도 전처럼 화를 내며 하는 설거지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 서로를 위해 배려하고 돕는 차원으로 설거지를 즐기는 듯하다.
설거지를 마치고 깨끗해진 부엌을 바라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설거지가 잘 되니 외식도 줄어들고, 반찬도 푸성해 졌다. 밥 먹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었다.
오랜만에 이미 지난 일을 꺼내어 글로 쓰려하니, 그 당시 감정이 그대로 살아나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쓸 때는 눈물이 났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믿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고, 그 당시 겪었던 수치심과 가족으로부터의 이탈감에 대한 충분한 위로와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리라.
조용히, 작은 부엌에 여전히 홀로 앉아 수치심과 외톨이 같은 심정을 껴안은 채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경아를 불러본다.
'경아야.... 경아야....'
어두운 부엌에서 경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참던 눈물을 흘린다.
왜 이제야 나를 찾아왔느냐고 원망하는 것 같다.
'경아야, 많이 힘들었지? 아버지가 너만 혼내시는 것 같아 너무 속상했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너도 tv도 보고 싶고, 시원한 마루에 누워 밤하늘도 보고 싶은데 아버지가 이유 없이 너를 혼내시니 많이 속상했겠다.'
어린 경아가 끅끅거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경아야, 애썼어. 그 어려운 시절 부모님을 돕고 싶어 하던 너의 고사리 같은 마음이 너무 이쁘다.
부모님이 네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했겠다.'
어린 경아가 공감을 받자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괜찮아... 이제 다 지나갔어. 그 일은 다 끝났어.'
이미 다 끝난 일을 우리는 참 많이도 끌어안고 복사 재생하며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알아차림 된다.
'경아아,
너는 더 이상 엄마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해야 했던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더 이상 불쌍한 엄마를 위해 너를 헌신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너대로 이미 충분해.'
어린 경아는 내 말을 잘 알아듣는다. 그동안 공부한 덕분에 수긍을 잘 하는 것이리라.
고집세고, 분노덩어리였던 경아가 이제는 수용적이고 회복적인 경아가 된 덕분이다.
'엄마는 불쌍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일을 감당하셨잖아.
너는 더 이상 무능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에 너를 자책하지 않아도 돼.
너도 아버지를 사랑하잖아. 아버지도 너를 사랑하셨어.'
어린 경아가 내 품에 안겨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어른인 내가 나의 작은 경아를 부드럽게 안아 머릿결을 어루만져준다.
그렇게 한참을 머무른다.
'경아야, 빨리 하고 들어와 tv 봐라. 재밌는 거 한다!'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놀랐다.
어린 경아와 내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 친절한 말씀이 들리다니 놀랍다.
이제 내 안에 계신 아버지는 과거처럼 무섭고 나만 혼내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든 나를 사랑해 주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나를 아껴주시는 아버지,
그대로의 아버지로 회복되었나 보다.
어린 경아와 어른인 내가 함께 손잡고 아버지 앞에 서서
아버지께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제가 큰 사랑을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둘을 꼭 껴안아주신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듯, 그저 사랑으로만 가득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기쁘고 감사하다.
갑자기 어둡던 부엌이 하얀색 싱크대가 놓인 부엌으로 착착착 바뀌어 간다.
그 부엌에서 어린 경아와 내가 아버지를 위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만든다.
내가 식탁에 앉아 있으라고 해도, 어린 경아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이 일 저 일을 알아서 척척해낸다.
어린 시절, 그 부엌에서의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겠다.
어린 경아와 나는 슈퍼갑 완벽조합의 커플이 되어, 이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지금껏 어린 경아가 말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린 경아가 전달해 주는 메시지를 마음으로 읽는다.
앞으로 설거지거리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어린 경아를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어린 경아와 함께
즐겁고 시원하게 깔끔하게 가뿐하게 부담 없이 스스슥~~ 순식간에
설거지를 해치울 것이다.
설거지는 더 이상 나의 수치심, 죄책감, 고통의 언어가 아니라
그저 설거지일 뿐인 설거지가 될 것이다.
깊고 깊은 한숨이 후~욱 하고 토해져 나온다.
그 일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