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57
일요일 아침에 감을 땄다. 서리가 내릴 무렵이라는 상강 霜降이 지났으니 감을 따야 할 시기였다. 작년에는 ‘해갈이’ 하느라 몇 개 따지 못했는데 올해는 풍성하게 열려 오가다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총 네 그루의 감나무 중 한 그루는 단감이고 나머지는 ‘대봉시’이다. 크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단맛이 출중하여 한두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인 감을 따느라 그럭저럭 한나절을 보냈다.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장빗발! 이라고, 감 따는 도구 두 개가 다섯 사람의 몫 정도는 거뜬히 해냈다. 수북하게 쌓인 감을 다섯 남매가 나눠 각자의 집으로 달큼하게 출발한다.
아빠가 평소에 하시던 모습이다. 감이든, 들깨나 참깨, 그 어떤 농작물이라도 아빠는 공평하게 나눴다.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으나, 언제나 그랬다. 맏이든, 막내든, 딸이든, 아들이든 각자의 몫은 다 같았다. 저울을 옆에 두고서 꼭 직접 무게를 재거나 누구든 정확하게 달아서 나누도록 했다. 처음엔 이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식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자식이나 사람 모두 한쪽으로 기울게 키우거나 대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감나무를 심고 첫 수확을 할 때의 기분을 느껴보라고 그랬을까. 아니면 그 첫 수확을 자식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나는 사람 누구라도 따 먹으라고 그랬을까. 아빠는 왜 대문 옆으로 길 가까운 곳에 감나무를 심으셨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감이 익어가면 자주 와 보지 못하는 나는 잠깐 조바심이 일어나곤 한다. 이 붉고 큰, 탐스럽게 익은 감을 누가 따가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마음이 먼저 일기 때문이다. 사실 해마다 나보다 먼저 누군가 감을 잔뜩 따가기도 한다. 지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지킬 마음도 없지만, 수확의 기쁨을 누구보다 먼저 누리고 싶은 마음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심은 감나무 한 그루가 무럭무럭 자라 처음 수확하게 되었는데 아빠는 계시지 않았다. 첫해에 수확한 감이 귀하고 소중해서 쉽게 먹지 못했다. 직접 심은 감을 한 개도 드시지 못하고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유난히 크고 붉은 감이 아빠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속 말을 하곤 한다. 누군가 가지를 찢어 감을 따간 흔적을 보면 속상한 마음도 이는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어쩌면 아빠는 이것까지 계산해 두고 있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워낙 이웃과 나누길 좋아하셨으니, 당신 없는 세상에서 자식들과 이웃이, 지나가는 누군가 감 따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나 길 가까이 감나무를 심은 게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남의 집 감이지만, 누군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라고, 아빠는 세상에 안 계셔도 나누고 계시는구나 싶다. 누군가 먹고 싶어서, 탐스러워서, 보기에 좋아서 따갔다 해도, 크게 서운해할 일 아니라고 애써 위로하는 나를 보면서 아직 멀었구나 싶다. 나눔도 사랑도 삶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붉은 감을 보듯 내 마음이 붉어진다.
요즘은 어딜 가도 감나무에 열린 감을 보는 눈이 바쁘다. 주황색 감이 열려 있는 풍경은 그 어떤 풍경보다 정감 있고 훈훈하고 따뜻하다. 담장 너머로 기울어 무게를 떨구고 있는 감, 가로수에 심긴 감, 멀리 산등성이로 보이는 감 모두가 한결같이 붉게 붉게 감을 달고 있는데, 그 화려함은 무엇보다 독보적이다.
가을 여행을 가면 단연 사게 되는 것이 그 지역의 단감이다. 대체로 남도 쪽 여행일 때 그렇다. 장수나 남원, 진안, 순천, 지리산 아래 동네의 단감은 여름을 보낸 날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사는 순간부터 설렌다. 과일 욕심 많다고 해도 단감만 못하고 홍시만 못하다. 어쩌면 이 무렵 남도 여행의 목적도 단단하게 잘 익은 단감을 사러 가는 길이라 해도 맞을 정도로 단감을 살 무렵이 좋으니, 이 맛을 어디에 비유하랴.
특히나 그 지역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파는 단감 사는 걸 좋아하는데, 단감에서조차 그 지역 냄새와 맛을 지닌 것만 같으니, 나는 시골에 맞춤한 사람 같다. 이렇게 남의 집 단감 한 박스를 다 먹고 나면 이제 우리 집 감 딸 시기가 온다.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서서히 익어가는 홍시 하나씩 먹는 맛을 느끼게 하려고 이웃에게 나눠 줄 감 숫자를 헤아린다. 이웃이 좋아하는 그만큼 나도 좋으니, 이만한 공평함도 없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