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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백과사전

주의사항은 다음 페이지에 쓰여 있었다

by 편J

갈등 백과사전


백문조를 한 마리 사들였다

"이쁘지 우리 아기, 엄마라고 해 봐요"

먹이를 주면서 여자가 말한다

하얀 물체가 뒷걸음친다


쌓이는 똥 무더기

새장 청소는 아이 차지다

레이스에서 슬리퍼 바닥으로

아이가 부르는 호칭을 툭툭 털어낸다

ㅇ ㅓ ㅁ ㅁ ㅏ...


'여자의 부리를 잘라주어야만 해. 잘 봐, 위아래 입술이 포개지지 않잖아'

새의 겨드랑이에 꼬부린 아이

척추를 잃은 잠이 깃털을 탐한다

다음은 부리다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새의 부리가 뾰족하게 자라면 먹이를 잡아채서 씨앗을 부수는데 어려워지고 사료 손실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잘라주어야 한다.


횃대가 비었다 흔들리지 않는다

새장 문을 여는 아이

"아가야! 하고 불러봐요"

새는 목소리를 바꾸었다

흘러내리는 붉은 부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부리를 자를 때는 출혈이 없도록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컷팅이 잘못되면 모이를 먹을 수 없게 돼서 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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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엄마라는 단어는 참 풀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누구에게나 생물학적 출생에 기여한 사람과 세상에 이르게 해 준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날카롭고 뾰족하고 번개처럼 요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먹이 대신 마음을 쪼아 먹는, 물을 마시지만 갈증에 이르지 못하는...


백문조를 키우던 이웃이 있었다. 흰 깃털을 가진 예쁜 새가 그렇게 똥을 많이 싸는지 몰랐다고 했다. 하루종일 시끄럽게 울어댄다고 했다.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날개를 푸드덕거리면 분변가루가 엄청나게 흩날린다고도 했다


백과사전을 뒤적이는 날이 많았다. 페이지 어디엔가 내 감정이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찢어지지 않는 두껍고 빳빳한 종이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듯 굵은 글씨들. 그렇게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다고 마법의 주문처럼 세상에 펄럭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본 백문조는 하얗고 고고하고 예쁜 새였다. 흰새가 있어야 빛이 나는 검은 망토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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