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은 돌의 체온으로 동그라미를 익힌다
4B연필로 원을 그리는데 얼마나 많은 직선을 그어야 하는지
가시넝쿨처럼 엉키고 엉켜 그 안에 흰 달하나
겨우 생겨난다
엇갈린 선을 지우면 지우개가루만큼 사라지는 각
수평으로 스며든 그림자
밀물을 벗겨낸다
바다가 낳은 날개, 섬 하나
낭떠러지 한 끝에
물고기가 낳아놓은 꿈, 일렁인다
바위가 지운 말들을 업고
몽돌은 물결에 쓸리기를 반복한다.
자그랑 자그랑
해변은 돌의 체온으로 동그라미를 익힌다
짠물에 젖었던 얼굴이
모서리를 잊었다
빈 쪽을 채우려고 달려들다가
품 안에 욕심을 놓칠까 하는 두려움
목젖 두드리는 속도에
눈동자가 구른다
연필의 원형, 명암으로 번지는데
심원을 지우며 작아지는 몸집
동그라미는 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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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원을 그리는 건 단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 엇갈리게 수없이 많은 직선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동그라미가 태어나는데 그 주위는 검은 연필 선이 진하게 남았다. 원이 되려면 저 뾰족하고 날카로운 선을 수백, 수천번 그 이상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백령면 연화리. 황토색 바다는 거칠었다. 삶의 테두리는 고요했는데 한 발만 나가면 바다였다. 파도 밑에는 늘 불안이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게 백령도는 수없이 많은 연필선이 지나가야만 생겨나는 동그라미 같았다.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를 데리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나가곤 했다. 모래밭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멀찍이 서서 그저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파도 위에서 출렁이던 해병대 검은 보트들... 아득함이었다.
서해바다 해그림자는 길어서 늘 급히 육지를 그늘로 만들어버렸다. 아이의 손 발을 털고 겉옷을 챙겨서 돌아오는 길은 늘 서둘러야 했다. 바다는 너무 빨리 어둠을 데려와서 그 온도가 몸에 스며들까 봐 겁이 났던 것도 같다. 해무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기는 어려웠다
친구는 아름다운 곳에 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시절 노트에 수없이 그었던 연필선. 선들이 거칠게 만나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각이 사라진다는 것, 동그라미가 태어나는 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였다. 반들반들 가볍게 떠다니던 콩돌들이 알려주었다
어느 드라마에선가 바다는 억겁의 한을 퍼내느라 파도친다고 했던가? 바다는 파도쳐야 살아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