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길거리에 검정 패딩 입은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여기저기서 개화 시기에 대한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자 문득 데이트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감을 깨달았다. 나는 여기 그대로 있는데 시간은 잘도 가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다 돌고 새해의 봄을 향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19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여름엔 너무 덥고, 겨울엔 너무 추워서 강제적으로 휴식기를 가졌고 날씨 좋은 봄, 가을에 집중했으니까 봄, 가을에는 매주 데이트를 나간 셈이다. 그중 13명과는 한 번의 데이트를 끝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 즐거운 대화를 나눴지만, 나와 인연이 아닌 분들이었다.
19명 중 3명과는 두 번의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 횟수에 기준을 정해둔 건 아니지만 아마 괜찮은 분 같은데 첫 만남 때 이성적인 호감을 발견하지는 못해서 확인차 한 번 더 본 게 아닌가 싶다. 나의 경우, 이성적인 끌림이라는 게 여러 번 만나서 발견하는 것은 아니었고 한번 만나보면 직관적으로 안다.
19명 중 3명과 세 번 이상 데이트를 했고 나는 그중 두 명을 좋아했다. A는 나와 사귈 생각이 없고 친구 할 생각도 없어서 내가 떠나야 했다. H는 이별 후 질척대는 나를 무응답으로 깠다. 한때 좋은 친구이자 좋아하는 남자를 보내고 결국 내게 남은 건 흑역사뿐인 건가.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싱글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추구하고 변화를 즐기지 않는 나는 1년 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공식적으로 한 살 더 먹은 나이와 딱 그만큼 진행되었을 노화일 테다. 물론 남은 것도 있다. 싱글임을 온전히 즐겼던 그 순간 나에 대한 기억이다.
집을 좋아하는 서울 촌놈은 처음으로 해 본 게 너무 많았다. 난생처음 금요일 밤에 이태원에 가보았고,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치킨을 시켜 먹었다. 화창한 가을에 서울숲, 올림픽공원에서 산책을 즐겼고 맛집을 찾아다녔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아이스스케이트를 타봤다. 힙하다는 을지로, 문래동을 가봤다. 남들은 어렸을 때 이미 다 경험했을 뻔한 데이트를 나는 마치 아껴두었던 드라마를 정주행 하듯 1년 만에 그렇게 해치웠다.
비록 잘 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경험만으로 조금 어른이 된 것 같다. 만남, 설렘, 이별, 후회, 그리움의 과정을 겪는 동안 새로운 나에 대해서 배웠다.
새롭게 안 사실은 첫째, 나도 외모를 보는 사람이었다. 외모가 멋있는 사람보다는 생각이 멋있는 사람에게 끌리기 때문에 나는 진짜 외모 안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외모에 대한 기대가 아주 낮을 뿐, 옆에 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외모는 보는 사람이었다.
둘째, 안정감을 주는 남자에게 상당한 매력을 느낀다. 이 매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이상형이 안정감을 주는 남자로 바뀌었을 정도다. 나는 혼자서 그럭저럭 잘 살지만,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키는 남자가 있을 때 더 행복감을 느끼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셋째, 나는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누구와 있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행 가서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다 괜찮은 사람이 나다. 알고 보니 나는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포용력은 크지만, 무언가를 하긴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넷째, 나는 쉬운 여자였다. 호감을 가진 상대가 나에게 진심이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금사빠에, 일단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걸 맞추는 지독한 사랑꾼이었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내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나를 예뻐해 주고 아껴 주는 남자가 있을까? 내가 그 사람을 찾지 못할까 봐 솔직히 겁이 난다. 날이 더 따뜻해지고 벚꽃이 만개하면, 내 마음에 다시 봄이 찾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