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직도 인간은 지구에 살고 있다. ‘아직도’라고 말하는 게 너무 야박하게 느껴진다면 한 번 돌이켜보자. 고다드 시절까지 갈 것도 없다. 우리는 달 착륙을 하고 나서도 한참을 이 행성에서 툭탁 거리며 시간을 보냈고, 화성에 사람을 보내고 나서도 탄소 냄새나 맡으며 뭉그적거렸다. 심지어 첫 번째 궤도 엘리베이터가 완성될 때 태어난 아이의 손주가 손주를 볼 정도의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인간은 지구에서 살고 있다. 물론 '해적'들은 이미 옛날에 태양계를 떠났고 우리 은하 곳곳에 흩어져서 무언가 엄청난 일들을 벌이고 있다. '해적'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볼 수 없고, 본다 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해적'들의 공통점은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도 나름 노력했다. 다이슨 스웜도 만들었고(만들다 말았지만), 워프항법도 개발했고(역시 만들다 말았지만), 태양계 곳곳에 거주지를 건설하였다(무진장 살기 힘들지만). 그리고 여전히 지구가 인간의 핵심거주지다. 대체 어째서!
‘인간이 과학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도 과학교사라서 기대를 했건만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10살짜리 소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 답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고 몇 년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워프를 예로 들어보자. 인간이 만든 워프 드라이브는 연비가 엄청나게 나쁘지만 훌륭히 작동한다. 문제는 워프 때 발생하는 감마선이다. 고작 수 십 톤의 질량을 겨우 1au 이동시키고 워프 종료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방사선은 지구 절반을 미디엄웰던으로 구워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워프 기술을 활용한 공간왜곡 렌즈를 이용해 방사선을 안전한 방향으로 굴절시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짝짝짝!
하지만 우주선 자체에 쏟아지는 방사선은 방법이 없다. 워프버블 안에서는 입자들의 상태가 불안정해지며 우주선의 모든 구성물질에서 미량의 방사선이 뿜어져 나온다. 탑승한 인간의 몸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때문에 인간은 워프버블 안에서 충분히 오래 있을 수가 없다. 현재 수준의 워프기술로 알파 센타우리를 간다면 도착할 때쯤 탑승자는 급성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난제를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또 추가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해적'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방사선에 견딜 수 있는 형태로 스스로를 재구성해서 은하계를 잘만 돌아다녔다. '해적'들은 이제 워프를 쓰지도 않는다. 인간은 원리조차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우주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사라진다.
어찌어찌 노력해서 인간이 탈 수 있을 워프 우주선을 만들었다 치자. 그걸 타고 우주를 돌아다니며 영역을 확장하려 하면 또 문제가 생긴다. 특정 행성에서 진화한 생명체가 그 행성을 벗어나서 생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고등생명체일수록 그렇다. 당장 지구 외의 주거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영구거주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거기서 사는 사람들은 보통 20년 정도 견디면 오래 버틴 거다. 견디지 못하고 지구로 돌아오거나 이런저런 병으로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중력 차이, 몇 가지 미생물의 부족, 하늘의 색깔이 다른 것만으로도 인간의 신체는 점점 망가졌고 정신은 더 빨리 망가졌다.
중력과 광량이 거의 동일한 행성을 찾아서 테라포밍을 하면 된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침팬지가 조금만 더 진화해도 그들보다는 똑똑한 소리를 할 거다. 한 행성의 환경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가능한지도 미지수이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거기 들어가는 수고와 시간을 고려하면 차라리 인간을 뜯어고치고 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몇 세대 전의 조상님들은 실제로 인간을 뜯어고쳐봤다. 결과는 말 안 해도 알거라 생각한다. 이렇듯 인간이 아직도 지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한계 때문이지만 좋은 변명거리가 하나 있긴 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