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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윤 Oct 29. 2024

중력 콘서트

2화

워프 이야기를 더해보자. 인간이 사용할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기술적 난제 외에도 인간이 워프기술을 봉인한 이유가 있다. ‘해적’들 때문이다. ‘해적’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딱 한 번 우리의 일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바로 인류가 첫 번째 워프 실험을 했을 때였다.

고작 실증을 위한 소규모 워프를 시도하는데도 어마어마한 양의 반물질이 필요했고 때문에 다이슨 스웜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다이슨 스웜의 완성도가 1%에 도달했을 때 실험에 필요한 양의 반물질 생산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생산되는 에너지를 다른 멋진 곳(주로 반물질 폭탄이었다)에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결국 3%가 건설되었을 때 간신히 필요한 반물질을 확보했다. 그리고 대망의 실험 날, 인간이 뭔가 큰일을 할 때마다 얼굴을 보이는 오랜 친구 휴먼에러가 나타났고 녀석이 그날 저지른 일은 인류사를 통틀어서 두 번째로 나쁜 것이었다.

워프라는 이름의 시공간조작 기술은 천문학적인 수준의 초고밀도 에너지를 지나치게 예민한 초정밀 기계를 통해 더럽게 복잡한 프로세스로 사용한다. 본질적으로 반물질 알갱이를 어린아이에게 주고 공기놀이를 하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신경질적인 안전기준이 마련되었다.

실험은 머나먼 태양계 외곽에서 진행했고, 본실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프로젝트 참여자들 중 11명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강도 높은 예비실험이 행해졌다. 참고로 그중 8명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당대 최고의 두뇌들이 설계한 페일세이프 절차가 겹겹이 준비되었고 최악의 경우라도 지구로 향하는 감마선을 목성이 가릴 수 있도록 워프아웃 지점을 계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먼에러는 그 모든 걸 망칠 방법을 찾아냈다. 조심성이 지나쳐서 망한 경우랄까.

실험우주선은 몇 피코초의 오차로 목성 근처가 아니라 목성 내부에 워프아웃을 하였다. 덕분에 두 가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는데 하나는 목성 안에서 워프버블을 붕괴시키면 중력 특이점을 만들 수 있다는 거고, 또 하나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거다. 목성 안에 만들어진 미니블랙홀은 목성의 내부를 공동화시키며 성장하였고, 어느 순간 목성은 안쪽을 향해 맹렬히 무너져 내렸다. 붕괴속도가 너무 빨라서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하였고 목성은 외곽물질을 날려버리는 화려한 폭발과 함께 블랙홀로 재탄생하였다. 큰 일 같지만 여기까지는 인류에게 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목성은 충분히 멀리 있고 폭발 후 남은 질량으로 만들어진 블랙홀은 사건의 지평이 고작 2미터에 불과했으니까.

문제는 위성들이었다. 목성이 블랙홀이 되며 발생한 폭발과 질량손실로 인해 궤도 밖으로 튕겨져 나온 위성들은 자유(?)를 찾아 흩어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인 유로파는 어째서인지 지구를 향해 움직였다. 아마 자신과 이름이 같은 장소에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극을 막아준 건 ‘해적’들 중 하나였다. 뭘 어떻게 했는지,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다. 유로파는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새 사라져 버렸는데 그 존재와 부재 사이에 어떠한 인과도 관측할 수 없었다. 스스로 일으킨 대형사고에서 자신의 창조물 덕분에 구해진 인류는 공포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두 감정 중 어느 쪽이 더 큰지 고민하며 감사를 망설이고 있을 때, ‘해적’이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는 짧고 묵직했다.


‘더 이상 시공간 조작 기술을 개발하지 마라.’


이 말은 즉, 인간은 태양계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워프 같은 시공간 조작 기술은 태양계 밖으로 진출하는데 필수적이다. ‘해적’은 이 메시지가 권고나 부탁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중성자 별 두 개를 가져다가 태양계를 졸졸 따라다니게 한 것이다. 여차하면 둘의 궤도를 교차시켜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인류말살에는 좀 더 싸게 먹히는 방법이 많겠지만 녀석은 굳이 스케일이 큰 방식을 택하였다.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겠지. 아니면 그냥 과시욕이 있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별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에게 ‘노!’라고 답하는 것은 우주적 스케일의 배짱이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인류가 정신 나간 종족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그 후, 인류는 좋게 말해 맥이 풀려버렸다.

사실, 워프 없이 가까운 항성계에 진출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다이슨 스웜을 통해 반물질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췄으니 단순한 쌍소멸 엔진으로도 아광속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진취적인 목소리는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태양계 안에서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 그냥 적당히 지내자는 나른한 패배주의가 인류 전체에 퍼졌다. 본래 외우주 진출을 위한 에너지 생산용으로 계획된 다이슨 스웜은 건설이 중단되었다. 미완성의 다이슨 스웜에서 생산되는 에너지조차 현재의 인류문명 수준에서는 실컷 쓰고도 남아도는 양이었으니까. 그렇게 인류는 은하계의 한쪽 구석에서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지내는 반백수 같은 종족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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