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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Aug 26. 2023

파란 체크 셔츠와 타투

충격, ‘문신은 패션이 아니다’ 발언

여름 중반에 얇은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사서 아주 잘 입고 있다. 흰 티 위에 툭 걸친 출근룩 구성 요소이기도 하지만, 가끔 소년이고 싶은 휴일에 애용한다. 소년이라 불리기엔 시간도 머리도 과히 진해졌지만, 원래 자기에게 없는 걸 내보이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니겠나! 여유로운 부가 없는 사람이 이름값에 집착하고 약한 사람일수록 송곳니를 드러내며 주변에 으르렁대는 법이다. 해가 긴 계절이 오면 뜨거운 마초를 뿜으며 질주하고 싶은 사내들이 있고, 청량함을 한 움큼 쥔 채 걷고 싶은 소년이 있다. 나는 올해는 부쩍 소년이고 싶은 날이 잦다. 가끔 바람이거나 또 가끔 바다가 되고 싶을 때 밖을 감싼 푸른 결이 되어 주는 옷, 아무튼 이것만 있으면 나는 내 멋대로 여름 소년이다.



패션의 재미는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걸치고 싶은 무드를 고를 수 있다는 것. '껍데기는 가라'는 말은 여전히 선의 가치에 가까운 표어이지만, 아무리 알맹이에 초점을 맞춰보려 해도 우리의 몸은 껍데기를 매우 중요하게 느낀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을 선호하는 건 물론이요, 소풍을 갈 때, 클럽을 갈 때, 부모님과 외식을 나갈 때, 은연중에 TPO에 따라 다른 꾸밈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같은 바닷가여도 양양과 을왕리의 수영복은 다르다. 같은 사람도 흰 옥스퍼드 셔츠에 셀비지를 입으면 감각적-지적으로 보이지만, 넉넉한 회색 후드에 긴 양말에 반바지를 입으면 활동적이고 귀여워 보인다.

아이 좋아라


외관을 꾸미는 일은 사실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다. 트위터에서 재택 근무를 하더라도 꼭 샤워를 하고서 다린 와이셔츠를 차려입는다는 사람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잠옷 바람으로 씻지도 않은 채 컴퓨터를 켜는 것과는 다른 마음 가짐이기 때문이라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쎄, 아무도 없긴 - '내'가 보고 느끼고 있다. 친구 중에는 약속에 늦을지 언정 샤워부터 향수까지 꼭 풀세팅을 해야 외출을 하는 녀석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나'라는 사람이 준비된 느낌이 들기 때문에,  꾀죄죄한 상태로 나가 자신감없이 걸을 바에 아예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외양을 꾸미는 행위 - 곧 패션은 타인의 인정을 넘어서 스스로에 대한 집착이고 완성이며 방점이다. 옷은 외부의 공간과 나를 분리하는 껍질이지만 또한 삶을 유영할 수 있게 하는 날개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에서 문신은 의료 행위를 제외하면 불법이라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래도 2022년 기준 한국타투협회 자료에 의하면 연간 650만 건의 행위가 이뤄지고 있으며, 문신 염료 제조사 '더스탠다드'에 의하면 국내 누적 문신 피술자는 300만 명(눈썹 문신 등 반영구화장을 제외한 수치)에 달한다고 한다. 검색을 해보면서도 생각보다 높은 수치에 놀랐다 - 다들 어디에 문신을 숨겨놓고 다니는 건지! 생각지도 못한 지인이 내게 '나 사실 여기에 타투 있어'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해대서 인지 부조화를 몇 차례 겪었는데, 그렇게 넓어진 식견에도 여전히 이 수치는 놀랍다. 내 또래 중 적어도 10명 중 한 명은 문신이 있다는 것이니.  


(이 글에선 '문신'보다는 '타투'라는 외래어를 주로 사용하도록 하겠다. 문신이란 언어에는 불법과 폭력성이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타투는 좀 더 예술적이고 섹시한 느낌이니까, 괜히)


꼭 통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노출된 타투 비율이 높아졌다는 건 우리의 시선으로도 직접 확인이 가능하다. 체감상 2015년을 기점으로 일반 대중이 타투(문신)를 하는 빈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크고 화려하고 남성적인 문신보다는 작고 미니멀하고 여성적인 타투가 흔해졌고, 그래서인지 내 또래에서는 여성이 훨씬 높은 비율로 시술을 받는다. 크기가 작으니 그 부위도 다양하다. 과거 문신은 등, 목, 허벅지였다면 현재 타투는 어깻죽지, 발목, 쇄골 등 여리여리한 부위에서 쉽게 발견된다.



절대적 양이 늘어난 만큼 사회도 많이 익숙해졌고,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한번쯤'은 타투를 해보고 싶단 생각을 한다. 심지어 내 어머니께 "여자들 타투 있는 것 어떻게 생각해?"하고 여쭤봤더니 의외의 답변을 주시는 게 재밌었다 - “발목에 하나 있는 건 이쁘더라, 엄마도 한번 해보고 싶다 “. 나 또한 타투를 상상해 본 적이 아주 많다. 근육질 몸에 새겨진 남성적인 타투, 수컷이라면 다들 한편에 자리 잡은 로망이다. 그러나 시간 흘러 지금의 나는 타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직업과 사회적 시선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타투는 패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투에는 내재된 분위기가 있다. 나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이 알게 모르게 습득해 쌓여 편견으로 작용하는 문화적 층위를 차치하더라도, 타투에는 태생적으로 부위와 행위가 풍기는 섹슈얼함이 있다. 타투는 '은밀한 살갗에 기구를 삽입하는 행위'이다. 통증으로 기록되는 예술은 마조적인 향기를 내뿜고, 기구와 살갗에서 오는 뜨거움, 집중과 긴장으로 흐르는 땀에는 숨죽인 묘함이, 순간의 행위로 영원을 새긴다는 미래 없는 낭만이 있다. 타투샵에 담배, 데낄라, 섹스, 신음, 자유, 반항, 인센스의 이미지가 겹쳐 있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는 한국 제도와 케케묵은 편견으로만 빚어진 것이 아니다 - 해외 영화에서도 흔히 등장하지 않나. 검정을 애도로 받아들이고 하양을 순수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좀 더 보편적인, 과장을 좀 보태자면 관습이 조금 섞여 들어간 원형적 상징에 가깝다.


타투를 새기는 건 퓨처리즘에 직관적으로 반하는 행위로,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현재에 집중해 탄생하는 예술이다. 스치는 감정을 영구히 새기며, 시기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이를 정신적인 나약함과 잦은 감정적 동요, 혹은 미래를 저당 잡는 겉멋 등으로 확대해 타투인들을 비하할 이유는 없다 생각하고, 다만 위 특성으로 도출되는 개인적 결론만이 자명하다. 나는 할 생각이 없다.


타투의 박제적 성질은 타투인들에게 '영원'이라는 낭만 요소가 되지만, 누군가에게 있어선 오히려 주저할 사유가 된다. 나는 섹시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순수하고 싶을 때도 있으며, 프로페셔널하게 보여야 할 때도 있고, 근엄하게 보이고 싶을 때도 있다. 삶을 사회 안에서 끌고 가는 사람으로서 속만큼이나 겉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내게 타투는 영원히 차고 다녀야 하는 금목걸이와 같고, 바꿀 수 없는 보랏빛 머리, 평생을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신념처럼 보인다. 발찌는 멋진 장식이지만 이를 아무 때나 벗을 수 없을 때 족쇄로 불린다. 자유와 현재의 상징인 타투는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과거에 매여있게 만드는 낙인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타투는 그래서 현재에 삶에 어울리게 나를 꾸며내는 패션이라기보다, 혹은 단색 캔버스 같은 피부에 색감을 자유로이 덧대는 화장보다, 남의 손으로 나를 시술하는 성형이다. 문신의 힘을 빌어 폭력성을 과시하며 자신감 있게 다니고 싶은 양아치들을 비난하면서, 아름다운 장미와 나비를 발목과 쇄골에 새기는 여인들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사회가 아닌 행위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 둘의 차이는 크지 않다. 둘 다 폴리네시아의 먼 과거 전사처럼 주술적 성격이 조금 섞여 들어간, 각자가 추구하는 현재의 '미'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바꿀 수 없는 액세서리다.



삶은 영원이라는 낭만도, 본질이라는 이상도 없는 언제든 바뀌고 바꿀 수 있는 무당위성의 현재 집합이란 생각이 나를 타투 문화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머리가 너무 말랑거려져서 신념이란 것을 삭제해 가는 길에 있다. 잃을 것은 하나둘씩 더 생겨나고, 넓어진 시야의 폭만큼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어떠한 말도, 어떤 아름다움도, 자신도 믿을 수는 있지만 그 믿음의 영구성 만큼은 믿지 않는 칙칙함이 벗기기 힘든 모자처럼 내 머리에 씌워져 있다.


순간을 새기는 타투는 현재를 영원히 기록하는 행위이지만, 과거를 매순간 띄운 채 살아야하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는 매순간 과거가 되고 있다. 타투는 지울 수 없고, 그 위로 흉을 지게 해 덮을 뿐이다. 쓰고 지우며 흉지는 그 과정을 아름다움과 신념의 역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영원‘과 ’현재’ - 모순된 낭만을 품은 행위에 사회적 편견과 신체적 아픔을 뭉개는 타투 피시술인들의 무심 혹은 용기가 신기하다. 나는 확신에 조심스러워졌고, 불확실을 사회에 말할 용기가 줄어들었다. 뭐, 요즘 세상을 보면 그게 당연한 적응인 것도 같지만.


날카롭고 짙은 문신을 외복사근에 새기고 해변에서 몸을 드러내는, 동물로서 남성의 로망. 그래서 작게, 전거근에 고래와 파도를 새기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사실 어차피 다 벗은 몸은 섹시가 목적이니 그 정도는 새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여전히 든다.


다음에 태평양 어디 섹시한 해변으로 갈 일이 있다면, 그래, 나는 헤나 먼저 해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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