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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Apr 24. 2020

7. 만유인력-3

지독하게 원하는


내가 갑자기 화를 내며 카페에서 나간 뒤로, 거의 4개월 만에 우리는 만났다. 이 또한 아주 우연한 만남이었다. 나는 지방 분원에서 실습을 돌기 시작했고, 그가 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내가 분명 그를 마주하면 도저히 내 마음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고, 아주 추잡한 행동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흡기내과 실습 첫날, 나는 교수님, 전공의들과 한 데 섞여 잔뜩 긴장한 상태로 회진을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호흡기내과 교수님은 폴리클(의대 학생 실습생)들에게 어려운 질문들을 퍼붓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병동에서 한 시간 정도 기나긴 회진을 돌고, 마지막 순서로 중환자실 제일 끄트머리에 있던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할아버지를 끝으로 가운을 입은 무리들은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나를 포함한 폴리클 6명은 한 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중환자실 문을 벗어나자마자 복도에 서서 교수님의 여러 질문들을 방어해야만 했다. 나는 경직된 상태로 뻣뻣하게 서서 기계적으로 외워둔 대답들을 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문득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있었다.


그는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입구 쪽 벽에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살이 조금 빠진 것도 같고. 머리카락이 많이 길어서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아주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고, 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피식, 하고 웃는 것이 느껴졌다.


교수님의 질문 공세가 끝나고, 교수님은 이 녀석들아 공부 좀 해라, 라는 말을 남긴 채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혹시나 그가 아직도 있나 하여 조심스레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나는 환영이라도 본 걸까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속한 과는 중환자실에 올 일이 도통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절망했다. 그렇게나 의연해지고 싶었는데.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그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여서 나는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팔을 걷어 올려 드러났던 그의 단단한 팔과 잔뜩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중환자실 주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온통 피곤에 쩔고, 땀에 쩔은 의사들이 떡진 머리를 하고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역시나 방금 씻고 나온 듯한 그 말갛고 하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질감이 들었다. 그 모습은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되어, 자꾸만 그도 조금은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나, 하고 왜곡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 대해 계속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 날 있을 발표 ppt를 만들기 위해 밤 늦게까지 학생 실습실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서 자꾸 궁시렁대는 동기들의 불평 불만을 견딜 수가 없어 병원 밖으로 나와 벤치에 잠시 앉았다.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왜 안 들어가고 있어."


 때 그가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안 들어가고 있냐구."


그건 실제이지 아야 했다. 더 이상 그 지독한 것에 얽매일 수는 없기 때문에. 더는 그와 헤어진 뒤 토해내지 못한 마음이 터져 나와 숨을 헉헉 몰아쉬는, 사랑하지 않는 체 하는, 그를 연상하는 노래만 들어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그런 시간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석고상 같은 얼굴로 인상을 쓰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 슬픔이 관통해 지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자 구멍이 뻥 뚫렸다.


나는 팔을 허우적대며 그를 안아보려 일어섰다. 물론 나는 겁쟁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저 그의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냥요."


머리가 지끈거려 나는 다시 주저 앉았다. 하루 종일 고무 같은 빵 몇 개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아, 하면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 안 가득하게 비릿한 생의 감각이 전해졌다.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눈을 뜨면 그가 사라질까 봐. 또다시 땅을 치며 오열을 하고 손톱을 깨물며 하염없이 글을 써야 할까 봐.


그가 말 없이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내 눈높이맞춰 벤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덩치도 큰 사람이 그렇게 있는 것을 보니 약간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와 처음 만나기 시작할 때 난 분명 우울해서 식욕이 뚝 떨어졌는데 그와의 만남이 끝나고 난 뒤에는 오히려 폭식을 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겨울보다 최소한 3kg는 불어있는 상태였다.


"볼살이 다 없어졌네."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볼을 감쌌다. 차가워. 여름이 다 되었는데도 손이 차가웠다. 차가워. 추워. 옆에 있어도 너무 외로워.


나는 그와 단절되어 있었던 4개월을 떠올렸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울었고, 매일 글을 썼다. 그렇게라도 게워내지 않으면 내가 내 감정에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조금은 원망스럽게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나를 보며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눈. 진짜 좋다니까."


큰일이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연락하고 싶은 거 참느라.. 너 진짜.."


아, 좋아. 큰일이다.


"이렇게 다시 눈 앞에 나타날 거면 왜 그랬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속지 마 절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의 눈에 슬픔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혹시라도 우연히 그를 마주치면 아주 대범하게, 의연하게 그렇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오빠, 지내셨어요, 이렇게 말하고 슬쩍 웃으며 지나쳐야지 했는데. 몇 달 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멋있고, 저런 간질간질한 말들을 잘도 쏟아냈다. 정말 진심인 것처럼.


그러면 나는 결국 이렇게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상처 받아도 괜찮아.


그저 내게 한 순간이라도 사랑을 주세요.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리고 며칠 뒤, 열두 시가 넘은 새벽이었다. 밤은 아주 어두웠고 유난히 가로등 불빛이 밝게 느껴져 약간은 부끄러웠다. 그가 내게 손을 뻗어 팔꿈치께였나, 볼 부근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귓볼이었나, 어쨌든 나를 살짝 쓸어내렸다.


"너는 살결이 부드러워서, 수영과 어울려. 아주 잘할 것 같아."


나는 이상하게 아주 잘할 것 같아, 라는 말이 쑥스러웠다. 그는 타이트한 검은색 티셔츠에 꼭 맞는 청바지를 입고 검은색 쪼리를 신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역시나 방금 세수를 하고 나온 듯이 말갛고 머리는 촉촉해서 묘하게 야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몸의 윤곽이 드러나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선물이라며 만년필을 내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계절이 바뀌어 우리 둘의 옷차림이 모두 얇아져 있었고, 반팔 아래로 맨살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것도 팔짱을 낀 것도 아닌데 실수인 척하면서 자꾸만 팔을 부딪쳤다.


그가 내 손을 살짝 끌더니 치킨집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치킨이라니. 나는 오랜만에 만나서는 그 앞에서 쩝쩝거리며 치킨을 먹을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포크 두 개로 치킨을 깨작대면서, 맥주를 홀짝거렸다. 술에 취하니 치킨이 좀 맛있게 느껴져서 나는  집중해서 살을 발라 먹었다. 나는 맥주 몇 모금에 약간은 노곤하기도 하고 술기운이 오르기도 해서 발목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저는 술버릇이 먹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자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가 그런 웃음을 지을 때 나는 그의 얼굴 주변 위로 물방울들이 톡톡 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비 온 뒤의 차가운 공기, 물에 젖은 나무껍질 냄새, 자그마한 물 웅덩이. 그런 것들이 생각나는 웃음이었다.


내가 약간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 그는 이미 나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가 헤어져야 할 길목, 그러니까 병원 건물이 거의 다 보일 즈음에, 그가 내 팔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같이 있고 싶어."


나는 그런 말의 속뜻을 모른 척하기에는 이미 너무 어른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까치발을 하고 그에게 입맞춤으로 화답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문제는 나도 사실 그를 원했다는 것이다.


"같이 있고 싶어.."


그가 나를 조금 더 끌어당겨 품에 가두었을 때 내 머리 바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불빛들은 미약하고 가벼워 내 정수리에 닿자마자 부스스 흩어져 버렸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수줍음 따위들을 털어냈다.


그가 내 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에 조금 더 힘을 싣자,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입술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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