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밖의 세상은 만개한 벚꽃과 4월의 햇살로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고요하고 공기가 부드러웠다. 가끔 오던 서울에서 느끼는 도시 특유의 정취가 났다. 여기저기 걸으며 이곳을 즐길 기던 때가,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홍대에서 인디밴드 공연을 보던 때가 생각났다. 이제는 내게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아닌, 남은 삶 동안 내 머리의 안부를 맡길 병원이 있는 곳이 된 이 도시의 새로운 입지가 사뭇 낯설었다. 덕분에 축 늘어진 몸을 겨우 자동차 뒷좌석에 구겨 넣고 수원 오빠네로 향했다.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어서 퇴원했지만, 수술 9일 차인 몸은 병원 밖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먹고 산책하고 주로 누워있었다. 수술 부위에 의료용 스테이플을 아직 제거하지 못해서 누우면 계속 신경이 쓰였다. 퇴원 후 일주일 정도 있다 살이 완전히 다 아물면 집 근처 정형외과에서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손가락으로 목 뒤를 쓸어보면 내 살이 아닌 낯선 이물질이 드르륵 하고 손에 걸렸다. 8개에서 10개쯤 되는 것 같다. 꺼림칙한 소름이 돋았다.
방사선 치료까지 한 달하고 열흘 정도가 남았다. 그 사이 MRI 및 CT 검사와 머리에 씌울 고정용 마스크 제작 등으로 몇 번 더 병원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갑갑해서 더는 서울에 못 있겠다며 한사코 부산으로 가자고 하셨다. 내 병시중으로 힘드셨을 엄마에게도 휴가가 필요한 것 같아 의료용 스테이플만 제거하고 부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나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부산에 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몇몇 지인이 시간을 내 면회를 오긴 했지만, 왠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뇌종양이라는 사실, 악성 종양이라 암 환자라는 것, 수술과 병원 생활로 수척한 모습, 거기다 앞으로 남은 방사선 치료까지. 듣고만 있어도 너무 벅찬 일련의 사건에 여지없이 꽂히는 그들의 안쓰러운 눈빛이 싫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심스러운 위로 뒤로 종국에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내면의 안도가 뻔히 읽혔다. 물론 특정한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혼자만 느낀 건지도 모른다. 근데 이게 쓰라렸다.
당연히 가까운 이들은 내게 그런 감정을 주지 않았다. 어떤 친구는 오히려 나를 환기했다. 하루는 대학 후배를 만나 백화점 9층 식당가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보자고 한 거 보니 위로해 주려나 싶었다. 그런데 몇 시간을 본인 얘기만 하더니 갑자기 신세 한탄을 하면서 ‘내가 이러다 죽지 싶었다’며 막 우는 거다. 나는 순간 ‘정말 죽을 뻔한 뇌종양 암 환자’인 나를 앞에 놓고 뭘 하는 거지 싶었다. 그런데 후배의 말은 이거였다.
“언니, 우리 길에 보면 택시 있잖아요. 엄청 많잖아. 근데 그게 택시등을 달고 있어서 잘 보이는 거거든. 암 환자도 똑같아요. 우리나라 암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길에 가면 천지로 널렸다. 근데 그게 택시처럼 표가 안 날 뿐이지.”
그랬다. 그 친구에게 암 환자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고칠 수 있는 병이고 수술 잘 됐으니 회복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오히려 본인의 삶이, 길은 보이지 않는데 아이들 육아에 경제활동까지 하는 그 팍팍하고 고된 삶이 고칠 수 없는 병처럼 암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던 거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누군가의 불행에서 상대적 안도감을 찾는다고. 후배의 말에 나는 잠시나마 비련의 여주인공 놀이에서 벗어났다.
퇴원하면서 받은 온갖 서류에는 사실만이 고스란히 기재돼 있었다. 두개골을 여는 개두술을 했고 종양은 4 뇌실에 4.5 센티미터 크기의 악성도 2단계였다. 수많은 숫자와 사진은 수술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했다. 단지 남아있는 미량의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하는 거였다. 그 어디에도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관한 자료는 없었다. 그러니 의학적 사실은 청승 그만 떨고 방사선 치료 잘 받고 회복이나 잘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겸허히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