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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폰더 Mar 19. 2024

방사선 치료

    걱정은 상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정보다. 겪어보지 않은 대상의 불확실성은 ‘가능성’이 되어 인간에게 ‘도전’이라는 무한한 잠재력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넘어진 사람에겐 이대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좌절감과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방사선 치료는 후자였다. 항암치료보다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아 막연히 두려웠다. 방사능에 피폭돼 온몸의 세포가 제 기능을 잃고 썩어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내가 가공의 두려움에 허우적댈 때 의료진은 실제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개두술 전, MRI 검사 결과 척추에서 미세한 무언가가 발견됐는데 이게 정확히 암세포인지 그냥 뼛조각이거나 기타 물질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제거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척추까지 확대하면 난소가 기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결혼 생각이 없었던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나, 아직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 환자의 생식능력을 보존하는 일은 의료진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 듯 보였다. 고심하던 교수님 일단 지켜보자고 하셨고 척추의 미세 물질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추적 관찰의 대상으로 분류됐다. 

    방사선 치료는 4 뇌실 안 종양을 99.9% 박리한 자리에 남아있는 0.1%의 암세포를 제거하는 게 목표였다. 더불어 종양과 뇌 조직의 유착이 예상보다 심하지 않아서 수술이 훌륭히 잘 됐지만, 종양과 인접해 있던 주변 조직에는 암세포가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방사선으로 재발이나 전이 가능성을 제거하자는 거였다.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 당연히 치료에 동의했다.

    만일을 대비한 보조적 치료라 간단할 거라 생각했던 방사선 치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이 또한 본격적인 치료의 한 장르였다. 피폭을 최소화하면서 병변 부위의 암세포를 사멸하기 위해서는 최소 25회에서 40회까지가 필요했다. 준비 과정도 꽤 복잡했다. MRI와 CT 검사가 추가로 진행됐고 방사선이 다른 위치에 조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마스크를 제작했다. 정확한 위치를 잡아내기 위해 3차원 소프트웨어가 사용됐고 이걸로 프로그램을 설계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한 달의 준비 기간을 거쳐 6월 4일 첫 방사선 치료가 시작됐다. 

    수술이 42.195km의 풀 마라톤을 한 번에 뛰는 일이라면 방사선 치료는 매일 4km씩 뛰는 조깅이었다. 출근하듯 매일 정해진 시간에 병원에 가야 했다. 치료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이고 방사선을 조사하는 동안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마스크가 너무 꽉 껴서 그 고통만 느껴졌다. 분명히 맞춤으로 제작한 건데도 작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딱 맞았다. 아이언 마스크를 쓰고 지하 감옥에 갇힌 왕자의 기분을 느꼈다. 그것만 의식한 채 나는 이 과정이 남아있는지 어떤지도 모를 암세포를 죽이는 작업이려니 생각하고 멍하니 누워있었다. 

    치료가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의사가 알렸던 여러 부작용도 딱히 나타나지 않아 이 정도면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러 부작용 중 많은 환자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준다는 탈모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아무 이상 없던 컨디션은 점점 무거워졌다. 어느 순간 10분의 방사선 조사가 끝나고 치료기에서 내려올 때면 다리가 중량 밴드를 차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고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20kg 바벨을 메고 스미스머신 아래 서 있는 느낌이었다. 구토나 구역질은 없었지만 입맛도 점점 잃어가고 극도로 피로했다. 방사선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로기 상태로 일수 카드에 도장 찍듯 병원에 갔다. 실제로 3단으로 접는 종이로 된 카드가 있었다. 간호사가 매번 치료 확인 날짜를 손으로 기재했다. 그렇게 카드를 주고받으며 한 달을 고스란히 보내고 날짜 칸이 절반쯤 채워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방사선 치료는 7월 9일 25회 차로 종료됐다. 그날 가족끼리 조촐하게 케이크에 초를 꽂아 마지막 치료를 축하했다. 믿기지 않은 순간이었다. 여덟 시간의 대수술을 거쳐 스물다섯 번의 방사선 치료를 하고도 살아있는 게 놀라웠다.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제자리를 지켜준 내 모근이 대견했다. 수술 후 6개월 뒤 MRI 검사를 시작으로 매년 뇌 사진을 찍고 척추의 미세 물질도 관찰해야 하지만 일단 나는 이겨냈고 살아남았다. 이제 멀리 볼 것도 없이 국가가 암환자를 산정특례로 인정해 의료비 혜택을 주는 5년 동안 생존해 보자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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