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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폰더 Mar 22. 2024

바람은 바람처럼

    치료를 끝내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벚꽃이 떨어진 자리에 연녹색 새순이 앉았다. 대기가 뜨거워지는 여름날의 냄새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모든 게 반짝이고 활기 넘치는 여름을 좋아한다.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눅진한 공기와 짠 내도 좋다. 내게 주어진 강제 휴식을 제대로 즐기고 싶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지불하고 운동을 배웠다. 운동 신경은 내게 주어진 능력은 아니었으나 이전과 다르게 살아야 암의 재방문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 덕분에 지금은 혼자서도 헬스장에 간다. 주말마다 등산을 갔다.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해 산을 타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막상 다녀보니 우리나라 산이 참 아름다웠다. 산 공기는 바다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더 가볍고 찌르는 맛이 있다.

    거의 매년 갔던 캐리비안베이도 갔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위험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막상 결과물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쩍 수척한 사진 속 모습이 짠하기도 했다. 호텔 룸을 업그레이드해 오션 뷰의 이그제큐티브 룸을 누렸다. 이럴 때 해운대는 참 매력적이다. 국내 여행을 다녔다. 장엄한 산과 거친 바다를 품은 강원도의 매력에 빠졌다.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대학원에 들어갔다. 영어학을 전공하지 못한 한을 풀고 싶었다. 퇴원하면 꼭 하겠다고 결심한 리스트의 1번이었다. 공부와는 다른 연구의 매력에 빠졌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1년 6개월을 쉬고 복직했다. 다시 일하는 것이 두려웠다. 일을 하면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무서웠다. 다행히 많은 것을 배려해 주셔서 힘들지 않은 일정으로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매년 아산병원을 방문했다. 갈 때마다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서울을 즐기다 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병원의 긴장감을 덮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고대하던 날이었다.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고 매년 MRI에 눕는 루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몹시 들떴다. 오전에 검사를 끝내고 몇 시간 뒤 진료실 앞에서 흥분 상태로 차례를 기다렸다. 호명되고 당당히 진료실로 들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검고 흰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의사의 입을 빤히 봤다.

    “네. 깨끗하네요. 이상 없습니다.”

    속으로 팡파르를 울렸다. ‘자 이제 그다음 대사를 하시죠.’

    “정상 생활하세요.”

    늘 하던 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할 말 있으시잖아요.’ 의사는 말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나섰다.

    “선생님, 저 이번에 5년 차니까 완치죠? 이제 안 와도 되는 거죠? 다 나은 거잖아요.”

    의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뇌종양은 그런 게 없어요. ‘평생’ 매년 검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도 1년에 한 번씩 보험 처리해 주는 거고요.”

    “네? 그게 무슨….”

    “내년에 또 오세요.”

    망연해진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한동안 정신이 들지 않았다. ‘완치’라는 바람(hope)은 코끝을 스치는 한낮 바람(wind)이 되어 흩어졌다. 대신 ‘평생’이 내려앉았다. 병원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곳이 발급한 종신 회원권을 뒤늦게 수령한 모양새였다. 수납용으로 등록된 하이패스 카드를 취소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덕분에 한동안 우울했다. 평생 뇌 사진을 찍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책에서 한 문구를 발견했다.

    “일어난 일은 언제나 잘된 일이다. <인생 수업 – 법륜>”

    내게 일어난 이 모든 일도 그럴까 생각해 봤다. 시간을 거슬러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반추해 보니 ‘왜 하필 나인가’로 시작했던 원망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여서 다행이다’로 바뀌었다. 엄마나 오빠였으면 더 큰 일이었을 거고 한 살이라도 젊은 내가 아팠으니 이만큼 회복한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술 일정이 앞당겨져 빨리 수술을 받은 게 ‘운이 좋았고’ 훌륭한 의료진 덕분에 수술이 잘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었다면 수술 전 뇌압으로 쓰러졌을 수도 있고 수술 후 큰 장애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덕분에 하고 싶었던 연구도 하고 휴지기가 있었지만 다시 사회로 돌아가 일원으로 살 수 있는 게 ‘꿈’만 같았다.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나 복직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울 기회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놀랍지만 내게 일어난 일도 잘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이 잘된 일이라면 내가 듣고 싶었던 ‘완치’라는 의학적 진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재하는 나의 삶이었다. 완치는 누군가에게 들을 필요 없이 스스로 살아가며 증명해야 할 과정이었다. 죽을 고비를 이겨낸 용맹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인생의 2막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다면 판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보다 이 고비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의미에 귀 기울이고 이전보다 나를 잘 돌보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매일을 소중히 살아가는 게 내게 남겨진 몫이었다. 그러니 뇌종양에는 없는 완치라는 허상에 더는 매달리지 말고 또 다음 5년을 잘살아 보자 생각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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