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범주다. 10년째 오는데도 긴장감에 목이 뻣뻣했다. 사람으로 빼곡히 채워진 의자 열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구부정한 자세에 거북목을 하고 모니터를 응시한 채로 마우스 휠만 움직이는 의사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10년을 매년 봤던 변함없는 모습에 친숙함이 느껴졌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
“이상 없네요. 깨끗합니다. 정상 생활하세요.”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어… 집이 부산이셨죠?”
“아… 네.”
“그럼 이제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매년 검사하세요. 굳이 서울까지 너무 머니까…”
“선생님, 저 하남으로 이사 왔어요!”
“어이구. 그래요? 수술한 데서 계속 보는 게 좋기는 한데. 허허허.”
“그럼요. 선생님이 계속 봐주셔야죠. 내년에 또 뵐게요!”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웃으면서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 밖 7월의 하늘은 손색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이전까지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체감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느낌이 어떤 건지 너무도 알고 싶고 죽기 전에 한 번은 느껴보고 싶다고 간절히 원할 뿐이었다. 그저 요절하는 게 바람이었다. 그런 삶에 찾은 온 뇌종양은 내 인생 가장 큰 기회였다. 행복해질 기회.
약 4개월간의 수술과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는데 이마에 닿는 햇살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유랑하듯 길을 걷는데 이름 모를 풀꽃이 저 혼자 바람에 하늘거렸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와 햇살과 바람, 풀꽃이 주는 조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런 값이 입력되자 ‘아, 행복하구나’라는 결괏값이 튀어나왔다. 작은 소리로 ‘행복하다’라고 내뱉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뚜껑이 한 번 열린 뇌는 행복의 디폴트 값을 재설정한 듯했다. 책을 읽다가 탄성을 자아내는 문체를 만나거나 음악을 듣다가 ‘범진의 인사’ 같은 취향 저격의 곡을 만날 때, 극장 맨 뒷줄을 혼자 차지하고 있을 때 문득 행복해졌다. 광안리 카페에서 바다를 보며 카페라테를 마실 때는 행복이 최고치에 달했다. 내겐 그저 거대한 철학적 논제였던 행복이 하릴없이 곁에 있었다.
뒤늦게 맛본 행복의 느낌은 조영제가 혈관을 타듯 너무 생생해서 저버릴 수가 없었다.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은 거다. 자연히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성공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대전제는 더는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평생 목을 매던 부와 명예도 그저 먼발치의 구경거리로 두었다.
이제는 보도블록을 누르는 발바닥의 느낌과 점심 식사 후 마시는 커피의 향, 청축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의 경쾌한 촉감이 더 소중하고 값지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중추신경계에서 뿜어내는 도파민이 얼마나 감사한지 비로소 안다. 비록 인생의 이력서에 화려한 병력이 남았고 덕분에 잃은 것도 많지만 밑지는 거래는 아니었다고 본다. 허들 넘기 ‘퀘스트’를 수행하고 나서 행복을 ‘득탬’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