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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Sep 02. 2024

92.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세계사」


아껴 읽다가 오늘 아무 데도 안 가고 다 읽어 버렸다.  

간만에 냄비밥을 해서 참치와 달걀 프라이를 얹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마치 6주 동안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었다.  

혼자 평온한 시간을 가지는 게 왠지 불편해 아이들과 희에게 톡을 했는데 모두 자기들 세상에서 바쁘다.  다행이다.


짐가방을 최소화하느라 책을 다섯 권만 가져와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는데도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느껴보는 여유를 이 책과 함께 즐기고 싶었다.  

조정래 작가의 ‘한강’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가 있지만 박완서 작가는 거기에 한국의 고질적인 가부장제에 대한 내용들이 더해진 글을 쓴다.  남자와 여자를 선과 악으로 나누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이 어떻게 서로와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스스로는 모른 채) 변해가는지 적나라하게 그려 낸다.


내가 느끼는 가족도 그런 면이 있다.  

지금의 평온한 내 일상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 심정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자립적이었던 내가 결혼하자마자 조선시대 사고방식에 데이며 깊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

더 잘하고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고 그런 내 노력이 별거 아니라는 취급을 받았을 때 지금 이 순간을 꿈꾸었다.  

날 아프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  그 꿈을 이루었는데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남아 있다.  

내 아이들과 희가 나 없이 괜찮은 것조차 감사와 함께 서운함이 드는 상반된 감정이 있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내용처럼 처음의 마음이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감사를 잃어버린다.

책 제목이 왜 ‘아주 오래된 농담’인지 한참 생각했다.  

초반에 주인공이 소년일 때 호감을 가졌던 소녀가 한 말 같다.  

소녀는 농담으로 말하고 잊고 소년은 진짜 의사가 되어 결국 나중에 그녀와 가까워지지만

가족의 울타리를 지키려는 그의 이중성에 그들의 관계는 다시 농담처럼 된다.


작가는 이 책에서 ‘가족-꿈-성취-사랑-금지된 사랑-익숙한 관계-돈-사람 마음-깊지만 짐처럼 느껴지는 관계’들을 시니컬하고 안쓰럽고 무덤덤하게 농담처럼 그려 놓았다.     


길가의 이름모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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