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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by 바람


김영하 작가를 알게 된 건 ‘검은 꽃’이라는 소설을 읽고나서이다.

일제강점기에 멕시코로 건너간 이민자들의 처절하고 험난한 애니깽 농장생활을 그린 신랄한 책이었다.

그 후 이 작가에게 반해 ‘퀴즈쇼’, ‘빛의 제국’, ‘오빠가 돌아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검은 꽃’ 같은 작품을 하나만 써도 여한이 없겠는데 그는 계속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면서도 저 먼 곳에 삶을 관장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듯한 내용의 소설들을 썼다.




역시.. 계속 읽고 싶고 읽으면서 분량이 줄어드는 게 아깝다. 이 책에 실린 문학평론가의 해설에 너무 쉽게 읽히다가 끝부분에 어리둥절해진다는 내용이 있다.

작가는 이번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하루에 몇 문장 못 썼을 정도로 더딘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혹은 그래서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소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70세 노인은 30년 동안 수없이 살인을 해 온 살인자다.

그의 행보와 생각들이 농담처럼 소설을 메운다. 결국 그가 조바심 냈던 일들은 그의 망상으로 밝혀지고 끝난다.

허무하다. 그 허무를 쓰고 싶었던 건가. 불교적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처럼.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일으킨 것이다.

갑자기 세상사가 거대한 농담 같이 느껴지면서 유머를 모르는 내가 살기 힘든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지리산 자락의 약모밀(삼백초/어성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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