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했다는 그 기억들을 아이들에게 다시 건네야지.
올해 들어 장례식장을 자주 가다 보니 죽음을 생각해 본다. 결혼식장에 가는 것보다 장례식장에 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나이가 드니 당연한가 싶지만 결혼할 사람보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분들도 죽음은 두려울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느껴왔던 허무감, 슬픔, 그리움, 후회등의 감정은 죽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우리는 죽음을 옆에서 바라볼 뿐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렵고 힘든 일도 해버릇하면 더 잘할 수 있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죽음을 여러 번 시도할 수는 없으니까. 몇몇은 그 단어조차도 꺼내는걸 터부시 한다. 곁에 있던 누군가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매번 보던 사람이 없다. 죽음을 정의하는 여러 단어나 문장들이 있겠지만 나는 죽음을 ’ 부재‘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가 누리던 삶에 구멍이 난 것처럼 그와 그녀가 사라진 것이다.
가족을 포함해서 직장동료, 친구들을 보면서 언제나 함께 할 거라는 착각을 한다. 매번 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 부모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를 낭비한다. 공포감과 무력감에 휩싸이다 보니 애써 부정하고 떨쳐내려 할 뿐이다. 함께하던 그들이 사라졌을 때, 그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한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상처가 여물지 않고 겉만 단단해지는 것과 같다. 그 안의 상처는 곪기도 하고 굳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1회에 그치고 소설이나 영화처럼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거나 가상세계라면 또 다른 삶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드러난 것은 없다. 삶이란 건 말 그대로 주어진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부모님이 우리에게 준 삶. 줬다는 표현보다 건네었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부모님도 조부모님이 준 삶을 나에게 건넨 것이다.
며칠 전에 내시경을 했던 분은 난소암을 앓고 있었다. 만으로 30살이 되지 않았지만 복수가 차오르고 전이되어 온몸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까? 걸음마를 하지 못하는 자식이 있던 그녀의 삶은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 또한 죽음과 가까워져 가고 있지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보다, 남은 가족의 아픔을 생각하게 된다.
당장 눈앞의 일도 알 수 없는 인생인데, 지금 당장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겠다. 아내와 산책을 하고, 아들과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지. 잔소리를 듣고 싸워가며 복작복작 살아내야겠다. 우리가 함께 했다는 그 기억들을 아이들에게 다시 건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