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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윤 Mar 04. 2024

저, 퇴사하겠습니다

입사 1주년에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얘들아, 나 퇴사하려고.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둘러앉은 동기 5명이 내 말을 듣곤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나도 퇴사하고 싶다. 우리 정말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얘들아." 누군가 대답했다. 흔히 던지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이 날은 우리 모두의 대학병원 수술실 입사 1주년 기념일이었다.


바닥에 떨어져서 컨타(contamination; 멸균 상태에서 오염이 되어 더 이상 수술에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된 1회용 멸균포 하나쯤은 기숙사로 가지고 와서 바닥에 깔고 고기를 구워 먹을 줄 아는 연차가 된 것이다.


한 날 한 시에 입사했어도 우리는 모두 다른 진료과로 배정받았다. 때문에 각자의 업무에 적응하는 데에 서로 큰 도움이 되어주진 못했지만 함께 살며 매일의 푸념도 위로도 함께 나누던 소중한 기숙사 동기들. 그래서 더욱 나의 굳은 결심이 담긴 '퇴사 선언'이 그리 진심으로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구 하나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해도 굳이 "왜?"라고 묻지는 않았을 만큼 서로의 고충을 짐작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긴긴 설명 없이 한 마디 선언을 하고는 다음 날 차지 선생님(한 진료과의 팀장급)께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 소식을 전하자, 동기들은 놀랍게도 모두 깜짝 놀라며(?) 섭섭해했다. 진짜 면담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첫 퇴사 면담


처음 신발을 받고 이름도 적기 전 찍었던 사진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답지 않게 각을 잡고 말씀드렸더니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셨나 보다. "너 그거 아니지?"라는 되물음에 특별한 대답 없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아마도 티가 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차지 선생님은 창고방으로 나를 데려가 문을 닫고 한숨을 푹 쉬셨다.


"왜 그래?"


지금까지 이런 일은 수도 없이 겪었다는 표정. 그럼에도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대략 이런 것들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와 동시에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으며, 즉 수술실을 떠나 나에게 더 맞는 일을 해보려 한다는 내용으로 끝마쳤던 기억 한다. 분명 어느 정도 말씀드릴 것들을 정리해서 갔으나 막상 선생님과 단 둘이 마주하고 있자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지리멸렬하게 늘어놓았던 것 같다.


"방광염이나 신우신염은 여기 다 달고 살아. 나도 약 먹고 있어."

"너 지금까지 트레이닝시켜놨는데 나가면 어떡하니."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병원 수술실은 정말 좋은 거야."

"나가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너 진짜 잘 생각해야 해."


마치 준비된 레퍼토리처럼 위와 같은 말들이 끊김 없이 술술 터져 나왔지만 고작 사회생활 2년 차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쿵쿵 내려앉았다. 내가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여기서 물러선다 해도 어차피 다시 겪어야 할 일이고 그때는 더 불편한 시간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나는 도망가는 게 아니라 또 하나의 결정을 한 것뿐이야.'


하루종일 가슴속에 새겼던 주문 같은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용기 내어 이야기했다.


"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미 도전하고 있고요."


대략 알아 들었다는 무언의 침묵 뒤에, 차지 선생님은 그럼 곧바로 과장님과의 면담을 잡아주겠다며 했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한 순간에 모든 절차가 진행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덕분에, 마음 약해지지 않고 반쯤은 뭐에 홀린 듯 과장님과의 면담에 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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