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마지막 날-그 엔딩 크레딧을 올리지 말아 주오

by 바삭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아오는 걸 반기는 사람이 있을까? 거의 노숙에 가까운 고된 여행을 했거나, 동행과 심하게 싸웠거나, 혹은 집에 있을 반려동물과 가족이 지독하게 보고 싶은 게 아닌 이상 여행의 끝은 항상 아쉽고 섭섭하다. 섭섭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을 것 같다.


1.

여행을 업으로 삼은 이가 아니고서야 보통의 성인에게 여행은 곧 일탈이자 휴가다. 여행이 끝났다는 건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출근, 등교, 육아 등 당장 주어질 의무가 있다면 돌아가는 길의 마음이 더욱 무겁다. 나는 여행지에서만큼은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좋았던 것만 기억하려 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일상에서는 그런 너그러운 태도가 증발해버린다. 변명하자면 밥벌이의 쳇바퀴를 굴리며 일과 관계에 치이다 보니 스트레스와 화가 마음속에 쌓이고 여유도 점점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여행의 끝이 더욱 아쉽다. 여행 마지막 날은 잠시 세상에 나와 자유를 맛보았던 ‘여유롭고 너그러운 자아’를 다시 마음속 깊이 봉인하고 ‘방어적이고 염세적인 자아’를 끄집어내야 하는 시간이다.


2.

여행의 끝은 허무하다. 계획적인 성향인 나의 경우, 여행을 떠나기 전 적게는 하루에서 많게는 여러 달의 준비 기간을 거친다. 그 기간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나도 모르게 여행의 설렘이 자리를 잡는다. 잠시 머무르는 이 손님은 여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때로는 과소비를 막아주기도 하고 (지금 헛돈 쓰지 말고 여행 가서 실컷 쓰자!) 분노를 억누르게 하고 (조금만 참으면 휴가다….) 생산성을 높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는 순간 설렘이라는 손님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 버리고 한동안은 그 휑한 빈자리를 느껴야만 한다.


3.

보편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전생이란 게 있다면 이곳에 살았었나 싶을 정도로 강한 이끌림을 느끼는 여행지가 있다. 분명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데 마치 어릴 적부터 살았던 동네를 걷고 있는 듯 편안하며 그곳을 떠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처럼 느껴진다. 6년 전에 딱 한 번 그런 기분을 느꼈을 때 나는 ‘이 여행지에 꼭 다시 와야지’라고 굳게 다짐했지만 아직까지도 실천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 두 가지 중 하나는 바로 ‘이 여행지에 꼭 다시 와야지’인 것 같다. (나머지 하나는 ‘언제 밥 한 번 먹자’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과 돈은 한정되어 있고 세상에 매력적인 여행지는 너무 많다. 분명 제2의 고향 같은 그 여행지를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막상 여행지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가본 장소를 선택하는 건 좀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이럴 때면 내가 상당히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걸 느끼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까지 올라가고 나면 극장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나는 영화관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다른 세계로 남김없이 빠져드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 어둠이 걷혔을 때 화들짝 놀라며 현실로 복귀하는 느낌이 싫다. 거의 다 먹은 팝콘을 주섬주섬 챙기고 줄을 서서 상영관을 빠져나갈 때는 왠지 모르게 좀 머쓱한 표정을 짓게 된다.


여행지의 숙소를 벗어나 공항으로 향할 때도, 인천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도, 심지어 짐을 찾을 때까지도 여행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들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라고 할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은 딱히 영화 내용의 연장선 상에 있는 건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그래도 아직 영화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든다. 여행의 단꿈에서 깨어나 현실의 불이 켜지는 순간은 무거운 캐리어와 함께 집에 들어와 내 방의 형광등을 켜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익숙한 조명 아래 익숙한 물건들을 목격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조금 머쓱한 마음으로 짐 정리를 시작한다.


짐을 정리하고, 샤워다운 샤워를 하고,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집이 아닌 곳에서의 샤워는 왠지 모르게 100%가 아닌 80%의 개운함만을 선사한다.) 침대에 누워 다음날 출근을 위한 알람까지 맞추고 나면 여행지에서 봤던 하늘은 마치 짧은 낮잠 속 기분 좋은 꿈처럼 느껴진다. 자고 일어나면 내가 언제 여행자였던 적이 있냐는 듯 태연하게 일상으로 복귀해, 지긋지긋함과 소중함을 동시에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소중함보다 지긋지긋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다시 어디로든 떠날 것이다. 여행은 언젠가 또 시작될 것이고, 시작이 있으려면 끝도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임을 상기하면 마지막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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