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by 바삭


그런 날이 있다. 맛있는 술과 음식이 가득하고 즐거운 대화가 끊이지 않으며 심지어 날씨까지 좋은 날. 바로 그런 밤에 나는 숙취라는 예정된 재앙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불구덩이를 향해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려드는 이 질주는 버거웠던 일주일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 들 만큼 즐겁다. 술잔이 비어갈수록 즐거움도 계속해서 커질 것 같지만 바로 그게 과음을 부르는 착각이다. 한 병이 두 병, 두 병이 세 병이 되다 보면 대화도 서서히 방향 감각을 잃는다. 알코올에 절여진 대화는 그 당시엔 책으로 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지만, 다음날이 되면 대부분 증발한다. 부질없고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껏 가장 악랄했던 숙취의 기억은 스물두 살의 겨울 즈음이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싶었는데 별안간 머리가 아프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끝없이 목이 마르고, 허공을 떠다니는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배터리가 5% 이상으로 충전되지 않는 휴대폰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다시는 취할 때까지 안 마실 거야!" 하고 결심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다짐은 대략 일주일 정도 지켜졌다.


그런 강렬한 사건을 제외하면, 보통 나는 숙취를 심하게 겪는 편은 아니다. 술김에 지나치게 솔직했던 것을 은은하게 후회하며 주섬주섬 일어나는 것이 보통 술 마신 다음날의 루틴인데, 몸 상태가 영 좋지 않더라도 물 한 잔 마시고 개운하게 씻고 나면 거의 괜찮아진다. 이런 부류의 술꾼들은 스스로의 알코올 해독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알딸딸함과 만취의 경계선은 안개 낀 지평선처럼 흐릿하고, 선을 넘는 건 순식간이다. 고백하건대 어제의 나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것 같다. 만취한 상태로 귀가해 곧바로 잠에 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양말도 안 벗은 채로 방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아직 차갑고 딱딱한 맨바닥에서 문제없이 숙면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한편, 세수도 안 하고 잠든 주제에 외출복 차림이라고 침대 위에는 올라가지 않은 지독함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숙취가 있어도 일상생활은 이어가야 한다. 술 때문에 중요한 일정을 망치거나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게 술꾼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러한 이유로 맨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오늘도 정시에 출근해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마무리했다. 직장인은 좀비가 되어도 출근할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긴 하지만, 좀비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고 평일에 과음을 하는 건 제 손으로 판 무덤이다. 더 효율적으로 쓰일 수도 있었을 정신력과 체력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는 건 참 아깝고도 멍청한 짓이다. 역시 다시는 평일에 과음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3295번째의 다짐을 해 본다.


사실 숙취는 그 어떤 질병보다 예방이 쉽다. 그냥 적당히 마시면 된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처음부터 과음하고 숙취에 시달릴 작정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술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다신 술 안 마신다'라고 다짐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술꾼들은 본인이 한 약속을 본인이 깨고 합리화하는 천하제일 거짓말쟁이들이므로 믿어주면 안 된다. 그래도 이제는 스무 살 때처럼 '절대로 취할 때까지 안 마실 거야' 같은 다짐은 안 한다. 대신 ‘평일에는 절주’, ‘한 달에 세 번 이상은 취하지 말기’ 같은 옹졸하고 구체적인 조건이 붙는다. 사람은 실현 가능한 수준의 목표를 세워야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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