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피탕이라는 음식을 처음 접한 건 몇 해 전, 배고픈 새벽에 무심코 누른 먹방 영상에서였다. 무슨무슨 탕이라길래 당연히 국물 음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김치+피자+탕수육의 줄임말이었다. 그 메뉴들이 같은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것도 충분히 새로운데 심지어 같이 조리를 했다고? 충격에 잠이 달아났다.
찾아보니 김피탕은 몇 년 사이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졌을 뿐 원래 존재하던 음식이라고 한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선 그 음식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아리송한 생김새에 비해 준수한 맛으로 탄탄한 마니아층까지 보유했다는 그 음식이 궁금해져 언젠가 꼭 김피탕을 맛보리라 다짐하며 잠들었는데, 그것은 벌써 6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고 나는 아직도 김피탕을 안 먹어봤다.
그놈의 세 단어 때문이다. 오늘은 드디어 시도해 볼까? 할 때마다 머릿속에 순차적으로 떠오르는 '차라리/이 돈으로/이왕이면'. 셋이 합쳐지면 이런 문장이 완성된다. '차라리 이 돈으로 피자랑 탕수육을 따로 사 먹는 게 낫지 않나? 아니다, 이왕이면 아는 맛인 치킨을 먹자.' 이럴 때 '차라리'나 '이왕이면' 뒤에 붙는 말은 내게 익숙한 것들이다. 경험해 봤으니까, 익숙하니까 무의식적으로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리는 걸까.
어쨌든 김피탕을 먹어봐야겠다고 6년이나 생각만 하고 있는 날 보며 느끼는 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크게는 직업을 선택하는 일부터 작게는 수건 개는 법까지) 과거에 해 왔던 행동들의 관성을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과거'라는 범주에 묶일 경험들이 많아질수록(달리 말하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 경험들이 성공적일수록 몸집을 불리는 블랙홀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만 같다. 새롭고 도전적인 생각은 무엇이든 집어삼켜 없애 버리려고.
김피탕을 처음 만든 사람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김치도 피자도 탕수육도 좋으니 세 가지를 한 번에 먹자! 였을까? 아니면 피자를 먹다 보니 느끼하고, 탕수육만 먹자니 심심해서 매콤한 김치를 추가했을까? 아니, 사실은 다 따로따로 시켜 먹느니 '차라리' 한 그릇에 함께 먹어보겠다고 생각했을지도. '차라리' 뒤에 과거의 것이 아닌 미래의 것을 갖다 두기만 해도 선택지가 무수히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