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누굴 위해 무얼 남겨야 할까

by 바삭


얼핏 들었을 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속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가 그렇다. 탐이 나긴 하지만 내 것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나무가 생겼을 때는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사실 대부분의 명언이나 조언 뒤에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완벽한 정답은 없으니 각자의 상황에 따라 알아서 해석하고 알아서 적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근사한 여행지에서 감탄하며 휴대폰 카메라 앱을 켤 때, 머릿속에서는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과 '사진보다는 경험'이라는 조언이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사진 대충 찍고 현재를 즐기자니 나중에 기억이 흐릿해지면 아쉬울 것 같고, 그렇다고 사진에 집중하자니 풍경을 눈에 담을 시간이 모자란다. 누군가는 눈으로 모든 걸 담으면서 동시에 멋진 사진도 건질 수 있겠지만 멀티 태스킹이 잘 안 되는 나는 그게 좀 힘들다.


지금까지는 주로 '남는 건 사진' 쪽이 승리를 거두었다. '인생 샷'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시대 흐름에 기꺼이 휩쓸려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승리에는 조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내가 미대를 졸업했으니 당연히 사진도 잘 찍겠거니 하고 기대감을 품어주는 이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고 나는 바로 그 예외에 속하는 사람이다. 사진에 별 재능 없는 사람이 누가 봐도 잘 나온 사진을 건지려면 짧은 순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나는 멀티 태스킹이 안 되는 바람에 완벽한 사진에 집중한 나머지 순간의 경험을 너무 자주 놓치곤 했다. 적당한 사진과 적당한 재미를 모두 잡은 여행이란 지금껏 내게 없었다. 사진을 엄청나게 건진 여행과 사진은 망했지만 그냥 엄청 재밌었던 여행, 극과 극의 결과물만 남았을 뿐이다.


요즘 승률이 높은 쪽은 주로 ‘사진보다는 경험’이다. ‘사진을 엄청 건진 여행’을 몇 번쯤 하고 나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사진첩에 남은 멋진 사진들을 보면 뿌듯함이 아니라 '···이걸 어디에 쓰지?' 하는 허무함이 앞섰던 것이다. 나는 딱히 사진첩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 없이 그저 보관만 해 두는 성향이라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게다가 SNS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며 '좋아요'를 향한 욕망도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현재 나의 사진첩은 거의 기록용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마저도 잘 보지 않아 데이터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죄책감만 커지고 있다.


가장 최근의 여행지에서 여태까지 본 적 없는 멋진 노을을 볼 기회가 있었다. 어차피 사진에 담기지도 않을 것 같아 대신 가족들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풍경을 공유했는데, 멋진 사진을 건지려고 애를 쓰던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그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사진을 찍은 이유는 그저 이 특별한 순간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다시 보지도 않는 '인생 샷'이 사진첩 가득 쌓여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지 다시 한번 유심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눈으로 즐기는 경험을 잠시 포기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그것은 무엇이었는지. 그게 SNS '좋아요'라도 뭐, 상관없다. 뭐가 되었든 분명한 목적만 있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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