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남자, 한국여자
내 남편은 어딘가 모르게 한국인 같은 영국인이다.
언젠가 작은 아이가 영국인이랑 원래 결혼을 하고 싶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파안대소를 하며
"아니. 전혀 아닌데. 결혼을 하려고 보니 영국인인거지 영국인이라서 결혼한 게 아니지." 하고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고향도 네 고향도 아닌 제3의 도시 울산광역시에서 영국남자와 서울여자가 만났다. 내가 영국남자를 만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고, 그도 한국여자를 만나는 것은 농담으로 조차 하지 않았었다. 만약 내가 국제결혼을 한다면 상대는 당연히 미국인이 될 줄 알았다. 나의 20대에 잠시라도 끼어든 남자들 중에 미국인은 있었지만 영국인은 없었다. 아마 한 번 마주칠 기회도 없었을 거다.
결혼을 일찍 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나의 행복하지 않은 가정환경과 어린 시절은 나를 결혼에 대해 회의적으로 만들었고, 나는 아이는 절대로 낳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린 내가 겪은 불행과 슬픔을 또 한 명의 인간이 겪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결혼 소식을 들은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하늘 아래 누군가가 일찍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나만 뺀 나머지 중에 누군가여야 했다.
'시집 안 간다는 애가 제일 빨리 간다더니 딱 너네.' 하던 친구, '네 커리어를 모두 버릴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거야?' 하며 부러워하던 친구도 있었다.
'도망치는 거냐...'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아빠는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아니에요.'
돌아보니 나는 아빠의 그 질문에 잠시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을 한 것 같다. 생각을 했다면 아마도 내 진짜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봐야 했을지 모르고, 그것은 어릴 적이나 커서나 늘 한결같이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나는 도망친 걸까?
불혹을 넘긴 지금 조차도 스물여섯 해를 살아 낸 그때 그 마음은 감히 들여다보지 못하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겁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