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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r 16. 2024

잘 사니, 서울서?

누군가의 갑작스런 안부 인사

"잘 사니 서울서"


평일 오전 11시, 평상시 이 시간대엔 카톡이 잘 울리지 않는데 웬일로 카톡이 왔다. 누군가 했더니 직전 회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팀 리드였다. 작년 퇴사 이후 약 9개월 만이었다. 퇴사한 이후 먼저 연락하거나 안부를 주고받진 않았기에 사실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함께 일했을 때의 상황으로 비추어 보아 서로의 삶이 바쁘다는 걸 알기도 했고 퇴사 후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지 못한 사람의 안부 카톡이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는 사람 마음이었다. 나는 답장을 했다.


"00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사실은 00로 이사했어요."


카톡을 보내자마자 1이 없어지더니 바로 답문이 왔다. 


"아 다시간거야?"

"네네, 작년 말에 왔어요"

"취업은"

"아니 곧바로 취업 얘기라니요?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으그

준비하고 나가래도"






한 번이라도 퇴사를 해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퇴사를 실행하기까지 어떤 한 가지 이유만으로 퇴사를 결정하진 않는다. 당시의 나 또한 감정적인 충동에 의해서라거나 일이나 사람으로 인해서와 같은 특정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한꺼번에 몰아닥쳐 나를 갉아먹고 있다고 느껴서였다. 뿌리 깊게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점점 약해져만 갔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대안을 마련해놓지 않은 채 레드카드를 내밀어야 했다. 내 몸과 마음에 온통 빨간등이 켜지기 전에 몇 개의 녹색등이라도 남아있을 때 나를 붙들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에 대한 계획이 전무함에도 팀 리드에게 퇴사 의사를 밝혔다. 


처음 내 의사를 팀 리드에게 밝혔을 때 그는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간 내가 보였던 이상징후를 어쩌면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같이 일하다 보면 동료의 컨디션이나 태도를 어렵지 않게 알게 되기 마련이고 그는 팀원에 대한 관심과 팀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더욱 잘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나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생각과 의사를 말했고 원하는 퇴사 시기도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차분하게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해도 팀과 조직을 뒤로한 채 이제 그만 떠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회사는 앞으로 더욱 성장해야 했고, 우리 팀은 해야 할 일이 많았으며, 팀 리드는 팀 내 과업들과 어깨에 지고 있는 책임감을 매번 느끼고 있었다. 나 또한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퇴사 고민을 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그 순간까지 마음은 한순간도 편치 않았다. 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누가 이직할 곳도 안 정해두고 나가냐?"


가벼운 질문처럼 던진 말이지만 그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현실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경기가 좋지 않아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상황이 안 좋은 스타트업은 늘어만 갔다. 우리 회사도 사실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아니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스타트업들도 마찬가지로 힘들다 보니 사람을 뽑으려고 하는 곳은 적었고 취업시장이 어려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지만 내 상황에 대한 자기변호와 마치 구렁텅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스스로를 구제하고 싶은 마음만이 급급했다.  


"좀만 더 버텨봐. 이직할 시간 벌어다 줄 테니까 갈 곳 정해두고 가"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이직할 시간을 벌어다 준다니. 직장인은 회사의 존속과 성장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회사에 들어왔으면 최소한 월급만큼의 일은 해야 하고, 일한 만큼의 성과를 내야 한다. 최소한 그렇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더 나은 지위에 오르고, 연봉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우수한 성과를 내야 한다. 직장에서는 과정이 아니라 철저히 결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냉정하지만 현실이다. 그게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잘못된 일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는 것만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월급에 대한 몫을 다하지 않고 근무 시간을 버티는 것은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나의 몫 이상을, 아니 나의 몫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제3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을 버티라니..? 그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진심이라고 해도 나는 그의 말대로 할 위인이 되지 못했다. 잠시만이라도 눈 감고 귀 닫고 모른 척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는 미련한 양심가. 그게 나였다.  


그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해도 그 말을 내뱉어 준 것 자체는 고마웠다.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 조금의 위로는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미 마음을 먹고 꺼낸 말이었는데 단호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날 하루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자아가 싸웠다.


'조금만 더 해보자, 00아. 너가 마음먹기에 달렸어.'

'지금까지도 이렇게 고민하고 내린 퇴사 결정인데, 너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는 게 중요해.'


하지만 한 번 내린 결정이 되돌려지진 않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지만 한 번 결정을 하고 나면 번복한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쉽사리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은 회사와 일에서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일수록 자책은 커져만 갔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로부터 2주 후. 나는 팀 리드에게 다시 대화를 청했다. 내 의사가 변하지 않았음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대화에서는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분명히 거듭 말씀드렸고 이번엔 언제까지 일하고 싶다고 날짜까지 말했다. 이번엔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이번에 그는 전략을 바꿨다. 이젠 회유책이었다. 그는 강적이었다. 


"부서를 옮겨보면 어때? 너 저번에 00쪽 일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이번 달 말에 조직개편 있는데 많이 바뀔 거야"


조직개편..? 두 번째 조직개편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서이동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게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회유책으로 자꾸만 나를 설득하려는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같이 일할 때 나는 그에게서 업무적으로 많이 배웠고, 새로운 것들을 배워갈수록 열정적으로 일했다. 업무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면 상황이 허락하는 선에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기 시작할 무렵, 회사에서 최초로 조직개편이 있었다. 조직개편의 가장 큰 목적은 목적조직에서 기능조직으로의 변화였다. 기존의 목적조직에서 있을 때 성과가 높은 팀과 낮은 팀 간의 갭이 너무 크고, 회사에서 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상향표준화한다는 것이 그 당위였다. 제품의 퀄리티를 빠르게 높여 매출을 올리는 것이 1순위 Objective였다. 조직개편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되었지만, 당시 우리 팀은 회사에서 가장 성과가 높은 팀 중 하나였고 15명이나 되는 팀원 간의 합도 좋았다.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개선사항이 생기면 적극적인 동료들의 참여와 아낌없는 지지로 뭉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었다. 


회사 차원의 조직개편은 리더십의 역할이라 우리 팀이 아쉽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도 안되었다. 그렇게 15명의 팀원들은 각 부서로 흩어지면서 7명의 팀원들만이 기존 팀에 남았다. 그 속에 나도 포함되었다. 내 포지션은 각 팀에 1명이었는데, 조직개편 후로 업무량은 훨씬 늘어났고 알게 모르게 그 전의 높은 성과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존재했다. 기존에도 내 포지션은 나 하나뿐이었지만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던 일부 팀원들은 제각기 떨어졌다. 조금씩 팀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팀 리드와 나도 다른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세 개의 팀을 총괄하는 직급으로 승진을 했고 나는 그대로였기에 사실상 더 이상 업무를 같이 하진 못하게 되었다. 직장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 행운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도 어쩌면 나에게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2주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 시점에 나는 고작 2주를 기다릴 힘도, 그러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이미 마음은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회사의 인사이동, 조직개편은 공지가 나기 전엔 믿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얻은, 웃픈 교훈이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회사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다양한 요인과 이유들로 언제든 상황은 변하고 그 회사의 상황이라는 건 일개 직원의 상황은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배려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부서이동이 된다고 해서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지만.






나는 말씀은 고맙지만 부서 이동을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과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상황이 바뀌어도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이러한 생각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평소의 나는 주관이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거절의 의사를 밝힐 때는 왜 이리도 명확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 같은지 모를 일이다. 그제야 그는 말했다.


"휴.. 그래, 알겠어

너 내가 더 안 붙잡았다고 나중에 원망하지 마라"


그러곤 이제 뭐 할 거냐며, 앞으로 어느 분야로 재취업할 예정인지 물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자 혹시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그를 봐온 바, 그는 주변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누구보다 많은 일을 자신이 짊어졌고 뜬금없이 팀원들에게 간식을 투척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스낵바의 과자였고 어떤 날은 여행 가서 산 딸기잼, 가끔은 삼겹살과 소주였다. 그는 자주 '일하기 싫다'라고 하면서도 꽤나 워커홀릭이었고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팀원들과 동료, 상사들에게 신임받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회사에서 환영하는 '맞춤형 인재'랄까. 


그래서인지 그를 따르는 팀원들이 많았다. 나 또한 그가 꽤 바람직한 리더라고 생각되었다. 일을 효율적으로 빠르게 해내며, 대부분 높은 성과를 가져왔다. 적은 리소스를 투입해서 높은 아웃풋을 내는 데에 탁월했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특히나 빠르게 성장해야 하는 스타트업에서 최적의 사람인 것 같았다. 자신의 일을 남에게 떠넘기거나 요령을 피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윗사람이 있으면 팀원들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해주기도 했다. 물론, 사람이 완벽할 수 없기에 단점 또한 존재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리더들의 모습과 다른 면모는 분명 존재했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를 보면서 더 깊이 생각하고,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나는 몇 주 후, 퇴사했다. 퇴사 후 큰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다시 봄이 되었다. 나는 퇴사 후에 먼저 그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가끔씩 떠오르기도 했지만 예전의 우여곡절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퇴사한 게 미안해서인지 섣불리 연락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도 여러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바빠졌고 그는 묻지 않아도 바쁘게 지낼 것이 분명했기에 조금씩 기억이 무뎌졌다. 먼저 연락하기도, 갑자기 안부를 묻기도 애매한 사람. 나에게 그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대개 그런 경우는 자연스레 서로에게 잊혀지면서 추억 속의 인물이 된다. 그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잘 지내냐는 내 물음에 그는 답했다.


"나야 뭐 똑같지?ㅋㅋㅋㅋ"


그는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바쁘게. 가끔은 '버티는 사람이 가장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퇴사', '도전'과 같은 단어가 화두가 되면서 서점에도, 유튜브에도 관련 책과 영상이 수없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퇴사를 2번이나 감행해 본 사람으로서, 누군가는 그게 대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가장 대단한 사람은 '그저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묵묵히, 그냥 버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는 일이며,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주어진 역할에 열성을 다하는 사람의 노고는 언제나 박수받아 마땅하다.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걍 하는 마음'이라는 밈도 생겼다. 이런 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천재인 것 같다. 






서울에 놀러 오면 연락하는 그의 말과 아직 언제 갈지 계획이 없지만 그래도 가게 되면 연락하겠다는 나의 대답으로 안부 연락은 끝맺었다. 그와 나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서울에 놀러 갈 때 진짜로 연락해서 우리는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지난 회사의 좋은 추억과 기억들로만 계속 간직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정답은 없고 나는 아마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것이다. 관계가 미래에 어떻게 되건 그런 좋고 나쁜 기억들과 경험들이 있기에 또 지금의 하루하루를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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