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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둥빠 Feb 03. 2021

해외 생활 실패, 야반도주

진짜 야반도주하다

A국에 있는 동안 나는 허리를 계속 다쳤다. 쌍둥이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을 안고 1년 넘게 밤을 새우고 있으니 허리가 안 나가려야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허리와 골반이 좋지 않다.


1년 7개월 정도 지나니 그래도 쌍둥이들이 밤에 조금씩 잠을 자기 시작했다. 유독 우리 애들이 밤잠을 통으로 자는 시기가 늦은 것 같았다. 왜 하필 우리 애들이! 그 사이 내 아내의 온몸 관절들은 더 악화되어 갔다. 특히, 아내는 출산 이후 바로 A국에 와서 몸을 회복할 시간이 아예 없었다. 내 몸도 마찬가지였다.


쌍둥이들이 2돌이 갓 지났을 무렵 뜻하지 않게 셋째가 생겼다. 쌍둥이들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셋째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이렇게 셋째가 찾아왔다. 어리둥절했지만 축복이었다. 감사했다. A국에서 셋째를 낳을 수는 없어서 한국으로 가서 출산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임신 8주 정도가 되었을 무렵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피가 조금 나온다고 한다. 급하게 휴가를 쓰고 아내를 산부인과에 데려갔다. A국은 의료 시스템이 정말 안 좋다. 일단 남자인 나는 진료실에 따라 들어갈 수도 없다. 21세기인 지금도 남녀칠세부동석이 지켜지는 나라다.


아기 심장 소리가 안 들린대.


진료실에서 나온 아내의 첫마디였다.      


‘아기 심장 소리가 안 들린다니... 내 심장은 이렇게 쿵쾅쿵쾅 뛰는데 뱃속의 우리 셋째는 심장이 안 뛴다니!’     

이제 8주 정도 된 시점이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의사가 아내에게 피검사를 하고 오라고 했단다. 시스템이 너무 안 좋은 A국은 피검사를 받는 것조차 힘들었다. 보험회사의 승인이 나오지 않으면 사람이 죽어가도 절대 수술을 해주지 않는 나라다. 아내의 피검사에 대한 보험 승인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지연되었다. 그 간단한 피검사를 못 받고 계속 이리저리 왔다 갔다만 했다.     


그 사이 어린 쌍둥이들은 짜증을 내고 난리다. 3시간이 흘렀다. 한국이었으면 3분도 안 걸리는 피검사를 3시간이 걸려서 겨우 받았다. 피검사를 받고 의사에게 다시 갔다. 근데! 의사가 퇴근했다고 한다!!!     


아니!!! 사람이 하혈하고 있는데 의사가 퇴근을 해?


간호사는 모르겠단다. 돌아온 답은 한마디였다. 


인샬라~

인살라는 이슬람교도의 관용구로 "신의 뜻이라면"이라는 의미다.


내일 다시 오라고 한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있나. 말이 안 통한다. 그렇게 반나절 동안 병원에서 달랑 피검사 하나 받고 하혈하고 있는 아내와 쌍둥이들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에 사정을 얘기하고 어쩔 수 없이 하루 휴가를 더 썼다. 다음날 다시 산부인과에 갔다. 유산인 것 같다고 한다. 추가로 검사를 더 하고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한다.      


아니 지금 하혈하는데 이틀 뒤까지 그냥 기다리는 게 말이 되나?


돌아온 답은 역시나 "인샬라"였다. 의사가 그러라고 하니 역시나 방법이 없었다. 다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했다. 쌍둥이들도 돌봐야 하고 밥하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정신 줄을 겨우 붙들고 있는데 회사에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사정을 얘기하고 휴가를 썼는데 굳이 나한테 연락을 왜 하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안 그래도 병원에 폭탄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회사까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니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병원은 이틀 뒤에 가야 하니 다음날은 출근을 해야 했다.     


‘아내가 움직이면 안 되는데... 쌍둥이들을 돌봐야 하니 안 움직일 수가 없을 텐데...’     


이 상황에 회사에 나가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회사에 가서 후다닥 처리해야 할 일을 하고 돌아왔다. 또 병원에 갔다. 진료실에 못 들어가는 나는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쌍둥이들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쌍둥이들은 상황을 모르니 병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답답하니 계속 짜증도 냈다. 아내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유산이래. 수술하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진짜 A국 병원과 의료진을 다 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진료 첫날, 의사는 하혈하는 아내를 두고 퇴근했으며,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해주다가 이제 와서 유산했으니 수술하라고 하니. 뭐 이런 거지 같은 놈들이 있나 싶었다.     


아내는 한국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는 절대 수술하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전에 그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셋째를 출산한 한국인 지인이 샤워하면 수술한 배에 물이 고인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아내는 이런 나라에서 수술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나라에 학을 뗐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내는 펑펑 울었다. 미안했다. 나 같이 못난 남편 때문에 어린 쌍둥이들을 데리고 그런 거지 같은 나라에 와서 그 고생을 해야 했는지... 


하혈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병원에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했는지... 하혈하는 사람을 두고 회사에 출근하고 집에서도 수시로 업무 연락을 해야 하는 남편을 만났는지...     


나 같았으면 이런 남편을 원망했을 거다. 그런데 아내는 한 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미안했다. 나도 같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참았다. 나는 버텨야 했다. 그날 밤에 바로 한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캐리어에 짐을 때려 넣었다.      


아내와 쌍둥이들은 다시는 A 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아예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회사에는 일주일 휴가를 냈다. 정말 필요한 옷가지와 물품만 캐리어 4개에 대충 챙겨 넣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그날 밤 한국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A국에 온 지 2년 만이었다. 


우리 가족의 해외 생활은 셋째의 유산과 함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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