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인가?
선임과의 갈등은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의욕이 꺾이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게 가장 컸다.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표정에서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이 차이는 10살 차, 상명하복이 군대보다 더 심한 요식업계에서 본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 밑으로 들어오니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을 테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태클이 들어왔다.
"칼질 누구한테 배웠어요?"
당근을 채 썰다가 대뜸 나에게 칼질 누구한테 배웠냐는 질문이 훅 들어왔다. 칼질하는 법을 가르쳐주려나 싶어서 아무한테도 안 배웠다고 말하니까,
"휴, 그러게 사장님한테 경력자 뽑자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이런 혼잣말을 내뱉으니 나는 적잖이 놀랐다. 텃세인가? 이해는 한다. 당장 자기 위의 선임은 그만두는 상황에서 가게는 유지해야 했기에 자신보다 경력은 안되더라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사람으로 후임을 뽑길 원했다는 걸.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뽑아봤자 금방 그만두고 나갈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직장 생활하며 눈칫밥을 먹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직접적인 갈굼이 아닌, 주방 막내인 내 입장에서 난처한 기분을 느낄만한 말들을 많이 들었다. 차라리 대놓고 갈궈줬으면 시원하게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다 어느 정도 갈등의 골이 쌓인 상황에서 폭발한 일이 생겼다. 내가 발주 넣은 제품과 다른 제품이 온 일이 생겼다. 그 상황에서 사실관계 확인하기도 전에 나보고 제대로 발주 안 하고 뭐했냐면서 역시나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거래처 실수로 잘못 온 것이었다.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지금 내 성격이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나도 억울한 감정이 계속 쌓여있었기 때문에 버럭 하면서 그동안 쌓인 걸 다 뱉어냈다.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요."
나는 그때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을 오랜만에 봐서인가. 나 역시 그렇게 한 번 쌓인 걸 뱉고 나니 후련했다. 그리고 며칠 후 회식을 했는데, 소주잔을 기울이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화해도 하고 많이 친해졌다.
나는 대체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선임이긴 해도 26살, 한창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할 나이 아닌가. 후임인 나에게 여느 또래가 가지고 있을 법한 고민을 털어놓는 게 고맙기도 해서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해줬었다.
참 부럽기도 했다. 26살,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이 아닌가. 그 날 이후로 나는 스스럼없이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많이 배웠다. 술 마신 다음날 지각하는 일이 잦은 게 문제였긴 해도 말이다.
그런데 며칠 뒤 사장님이 그 친구를 너무 쌀쌀맞게 대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화기애애했던 주방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점심 영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갈 때 그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했다.
"저, 그만둬요."
엥? 갑자기?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호주로 말이다. 호주 갈 거라는 말에 불현듯 예전 내 생각이 나면서 남일 같지가 않은 감정을 느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그만둔다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쭈뼛거리며 남은 사람들끼리 고생해야 되는 상황이 맘에 걸려서 미안하다고는 말하지만 어쩌겠나, 본인 인생인데...
어? 잠깐! 그럼 이제 사장님 다음 서열은 내가 되는 건가? 그렇다. 가게에 취직한 지 4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다. 칼질도 서툴고 롤 밖에 만들 줄 모르는 상황인데 이제 초밥도 해야 되고 당장 가게 운영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 때부터 나의 고생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생만 했다면 나는 진작에 그만뒀을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에게 기회가 빨리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환골탈태했다고 자부한다. 다음 편은 <No pain, no gain.> 고생한 만큼 실력이 급성장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려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