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다. 참 잘했어.”
21.11.5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과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엄마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나요?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 그 말은 인생에서 그가 가장 애면글면 찾아 헤매는 단 하나의 문장이 아닐까? 그를 살릴 수 있는 심장과 같은 말일 것이다.
침묵 끝에 그녀가 대답했다.
“수고했다. 참 잘했어. 이 말이 듣고 싶었어요."
오래된 음식에서는 타분한 맛이 난다. 오래 고인 마음에서는 돌샘이 생긴다. 깊게 패일 수록, 옹이 지고 성근 마음은 자유롭기 힘들다.
그녀의 대답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 얼마나 뻔한 대답인가? 그 뻔한 말을 해주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은 꿋꿋하고 굳세다는 뜻이다. 이 말을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같이 받아들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우리의 마음은 모두 우유처럼 부드럽다. 우유를 부드럽게 휘휘 저어주어야 더욱 부드러운 생크림이 된다. 마음을 부드럽게 휘휘 저어 주는 힘은 마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화나고 신경질 나고 질투 나고 우울하고 분노하고 기쁘고 웃음이 나며 눈보라 치고 꽃보라 치는 모든 마음에 아무 이유를 묻지 않고 "맞아"하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이게 화가 날 일인가? 왜 이렇게 힘들지? 한 것도 없는데.'
스스로를 향해 겨누는 날 선 화살을 내려놓고 그대로 마음을 읽어 준다.
'화가 난다면 화가 나는 거지. 성에 안차더라도, 어쩌면 성에 안차기에 더욱 힘이 드는 거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른 거니까.'
오늘 보험처리를 하며 진이 쭉 빠지는 일이 있었다. 잘 마무리되었지만 화나고 우울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화나고 우울한 마음이 조금은 친구를 찾은 듯했다.
정혜신 박사는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라고 말했다. 감정을 외면한 사람은 결국엔 자기를 잃어버리기 쉽다. 자기를 잃어버린 곳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책에서 주인공 '수전'은 지성에 의해 자신을 잃어버린다. 당연시되는 일들을 해내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 수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있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 '19호실'을 찾는다. 자기를 잃어버린 수전은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마'라고 표현한다. 빨간 머리에 초록 눈을 가졌고 막대기로 뱀을 툭툭 치는 못된 악마라고 칭한다. 홀로 있게 된 곳에서 악마가 자신임을 깨달은 수전은 조금씩 평온해진다. 자기감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앞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수고했어, 잘했어, 하는 말을 끝끝내 듣지 못했다고. 자기는 스스로를 안아주는 법을 배워야 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남을 비난하기는 참 쉬워도 누군가를 칭찬하고 격려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자기 수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받아주고 그 목소리에 응해줄 수 있다. 파커 파머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에서 깊은 우울증에 빠진 자기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건 자기 옆에 함께 앉아 발을 주물러주고 함께 끝없는 무기력함을 나눈 친구라고 기억했다.
내 감정을 응시하고 받아들인다. 타인의 눈빛을 공감하고 옆에서 함께 무기력함을 공유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 살아 숨 쉬는 자들의 소리, 질문하는 목소리, 대답하는 온기. 혼자 힘으로 헤어 나오기 힘든 깊은 우물에서 나를 살리는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