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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Jan 09. 2022

엄마도 꿈꿀 수 있을까?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탄생이다.

첫째는 방학, 둘째는 어린이집 퇴소로 셋이 쉼 없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날들이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면 강한 햇발이 쏟아져 들어온다. 엄마의 품을 벗어난 지가 언젠데 아침에 눈 뜨면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 하던 외침이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다. 거실에는 지난 밤 늦게까지 열린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아이들의 방학은 엄마의 종일 돌봄 노동을 수반한다. 끝없이 먹이고 씻기고 치우고 닦고 버리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 특히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을 먹여야 하나, 이다. 첫째와 둘째는 식성이 달라서 첫째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면 둘째가 걸리고, 둘째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면 첫째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나에게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물으면 글쎄요, 남이 해주는 음식? 하고 농담 반 말하겠지만 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물으면 줄줄 뽑아낼 수 있다.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당연히 내 정체성은 희미해진다. 그럴 때면 과거에 살아온 나의 흔적이 먼 전생의 일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유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진다. 아이들을 낳고 나서 엄마는 입버릇처럼 나에게 '껍데기'라고 하셨다. 그럴 때면 발끈해서 "알맹이지 왜 껍데기야?" 했는데 아이들을 낳아 키운다는 게 어찌 보면 알맹이는 모두 내어주고 껍데기만 남기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꾸는 꿈은 사라지고 아이의 꿈을 향해 안고 업고 돌진하는 자기 부인의 여정이다. 글을 쓴다는 게 사치요, 글을 써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건 도둑 심보처럼 들릴 지경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싶고 다듬고 싶고 내 존재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누리고 싶을 때면 우울한 마음이 잠기지 않는 수돗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살아있는 데 어떻게 꿈을 꾸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동네방네 쓰레기 모아다 만든 소꿉 상. 아이들은 어디서나 행복을 찾는다



환상이나 궤변으로 도피함 없이, 내일이면 훨씬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완벽한 행복을 만들어내려는 추구 없이 행복해야 한다. 이 순간을 절정으로 살아라. 내일 불행이 찾아올 것이다. 내일을 염려하지 마라.

_자크 엘륄, <존재의 이유>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폴 발레리의 말처럼 사랑하는 삶은 살아가는 이유다. 생명을 가진 자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품격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현실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게 돕는다. 헛된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놔두지 않는다. 아이들은 매 순간이 절정이고 행복을 누리는 최정점의 일순간이다.




신학자 샘 킨은 <춤추는 신 To a Dancing God>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즉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건의 고유한 성격이 내 안에 뿌리박게 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탈중심화를 겪어야만 한다."



'나'를 포기하며 많은 것을 얻는다. 아이들의 사랑을 얻고 나를 단련시킨다. 끊임없이 담금질하며 나를 확장시킨다. 스캇 펙의 말처럼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탄생이다." 아이들로 인해 나는 매일 매 순간 새로워진다.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용한 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인정 없는 어둔 공간인지 알겠다. 그럼에도 쓴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쓴다. 이 고통을 통해 옛것이 죽고 새것이 탄생하는 별세계를 맞이하고 싶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고 무용해서 글을 쓴다. 그 깊은 간극 사이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


바람 좋은 날, 아이 하원 차를 기다리며 루미의 시집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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