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Jul 16. 2024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몸 상태가 날씨와 같은 것이라면, 날씨에 맞는 행동을 해봐야겠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닌데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긴 힘들 때, 이 정도 아플 땐 약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정도 말이다. 사람마다 몸이 약해졌을 때 먼저 아파오는 부위가 있다. 나에겐 그게 목이다. 열은 잘 안 나지만 편도선이 붓고 식욕이 없어지며 몸살이 슬그머니 달라붙는다. 황사가 있거나 기온차가 클 때, 잠잘 때 창문을 열어 놓고 자거나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목이 붓는다. 그럴 때면 기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신체 기능이 어느 정도 저하됐는지 가늠해 보려 애쓰지만 알기가 쉽지 않다.


  "통증을 1부터 10이라고 했을 때, 10은 죽을 정도의 고통이에요. 지금 통증이 몇 정도 되는 것 같으세요?"

병원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고통을 잊을 정도로 고민이 생긴다. 아직 죽을 정도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몇이라고 해야 하나? 10에 가까운 숫자를 말하기엔 오버하는 것 같고, 5보다 작은 숫자를 말하기엔 심리적 고통에 비해 너무 초라한 숫자 같다. 내가 느껴본 '죽음에 가까운 고통'은 출산 정도 될까? 자연주의 출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관심이 생겼고 최대한 공부한 후에 담당 주치의와 상의해서 최대한 자연주의에 가깝게 아이를 낳았다. 


  엄마들 사이에 '3대 굴욕' 혹은 '산모 굴욕 3종 세트'라 일컫는 내진(의사가 두 손가락을 질내에 넣어 자궁경부의 딱딱한 정도, 길이 및 자궁경부가 얼마나 열렸는지와 태아가 얼마나 골반 내로 진입했는지 등을 검사하는 것), 제모, 관장을 하지 않거나 최소화하고 무통주사 없이 자연분만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물론 이건 내가 출산에 대해 공부하고 주치의와 상의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상황이 좋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통이 계속되자 공포가 엄습했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강하게 덮쳤다. 사람의 몸에서 사람이 나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나도 이렇게 엄마의 몸을 찢으며 태어난 거였나? 출산은 생물책이나 산부인과 문화센터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였다.


  그 고통은 10이 아니라 '100' 정도라 일컬어야 옳았다. 평소에 겪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므로. 그것은 내가 고통이라 깨닫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였다. 그런데 그것을 겨우 10에 넣어야 한다면 평소에 인후염이나 편도선염 등의 아픔은 대체 몇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우리는 '개근상'시대에서 자랐다. 아무리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했고, 열이 펄펄 들끓어도 출근해야 하는 괴로운 시절이었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한 가지 이점이 있다면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리라. 이제는 학교에서도 질병 결석제도가 있고, 개근상은 아예 사라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느 정도 아파야 학교를 빠지고, 약속을 취소하고, 운동을 쉴 수 있는 건지 의문이 있다. 아픈 건 상대적이지만 스스로 그 척도를 정하는 일은 어렵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들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아침에 복통을 호소하곤 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성화인 녀석들이 웬일로 아침밥도 거부하고 배도 만지지 못하게 거부하며 얼굴에 인상을 팍 쓰고 떼굴떼굴 구르는 것이다. 체한 걸까, 장염일까 온갖 상상을 하며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아침 일찍 소아과에 가면 아이들은 세상 편안한 얼굴로 다리를 동동 흔들며 여유를 부린다. 소아과 의사가 주는 사탕을 기대하며, 언제 아팠냐는 듯 대기실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며 진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봐왔을 의사는, 아이들이 진료실 문을 노크하고 입장할 때의 걸음걸이부터 유심히 지켜본다. 


  "그래, 꽃동이는 어디가 아파서 왔나?"

태어날 때부터 다니던 곳이라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소아과 주치의는 아이의 눈을 보며 묻는다. 아이는 사탕 바구니 쪽을 훑어보며 샐쭉 웃으며 답한다.

  "아까는 배가 엄청 아팠는데요, 지금은 안 아파요."


  예전에는 '꾀병'이라 불리던 증상이 이제는 '신경성 복통'이라는 거창한 진단으로 바뀌었다. 나도 아이였던 시절이 있던 사람으로서 '꾀병'이란 이름은 너무하긴 했다. 분명 아파서 아프다고 했을 텐데 거짓말이라고 나무라는 것 같으니까. 이젠 '신경성 복통'이란 이름을 달고 부모에게 아이를 너그럽게 대해주라는, '이해심'을 처방한다. 물론 의사는 간단한 약을 주지만 내 귀로 들리기엔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머리가 아프기도, 배가 아프기도, 심한 경우 구토를 하기도 해요. 아이들을 격려해 주고 많이 쉬고 놀게 해 주세요"라는 말로 들린다. 그럼에도 소아과 문을 나서며 아이가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천진한 얼굴로 "엄마, 그럼 오늘 학교 안 가도 되는 거지?"라고 물을 땐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아이들이 아플 땐 학교에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소아과에 가야 할지 피부과나 이비인후과에 가야 할지 등을 고민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플 때이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하며 스스로 판단해서 내 몸을 건사해야 할 어른인 나는 아픔의 '정도'와 '후속 조치'등이 늘 고민이다.


  장마로 비가 오락가락하고, 추웠다 더웠다 하더니 심상찮은 느낌이 다가왔다. '곧 목이 붓고 아프겠구나'하고 깨달음을 주는 익숙한 전조증상들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부어 침 넘김이 힘들고 몸이 무겁다. 하지만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이들이 아침밥을 굶고 지각을 할 수도 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완두콩을 넣은 잡곡밥을 짓고, 뚝배기에 야채를 다져 넣어 계란찜을 만들었다. 첫째는 엄마가 뭘 만들고 있나 보더니 냉장고에서 함박 스테이크를 꺼낸다. 어제도 먹었는데 오늘도 고기라니, 참 대단한 육식공룡이다. 첫째와 둘째를 먹이고 입혀서 등교, 등원시키고 나니 다시 몸의 아픔이 느껴진다. 오늘은 일주일에 하루 있는 아파트 분리수거 날이고, 운동을 가야 하는 날인데 쉬어, 말아? 내일부터 다시 장마가 시작된다는 데 빨래를 해, 말아? 침대와 부엌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다 알약을 입에 넣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남편이 저녁에 퇴근을 하고 해야 한다. 하루종일 남편도 회사에서 힘들 텐데 일을 하나라도 덜어주고 싶다. 분리수거 후엔 남편이 좋아하는 그릭요구르트를 만들고, 빨래도 돌렸다.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옷에서 꿉꿉한 냄새가 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옷이 청결했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침대로 다이빙하고 싶지만, 주섬주섬 운동 가방을 챙긴다. 다니고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오늘부터 팀전으로 출석체크 이벤트를 한다. 개인이 아니라 팀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안 가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는다. 만에 하나 아이들이 아파서 가정 돌봄을 하게 되면 몇 날 며칠은 내리 못 갈 텐데 갈 수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가둬야 팀에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 간단하게라도 하고 와야겠단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람이 어느 정도 아플 때 쉬어야 하는 걸까? 어느 정도 아파야 약을 먹는 걸까?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늘 고민이 된다. 전에는 나도 목이 부을 때마다 이비인후과에 갔다. 그런데 갈 때마다 약을 5-6종을 받다 보니 약 때문에 속도 더부룩하고 몸이 더 축나는 느낌이 들었다. 항생제를 먹고 싶지 않아도 한번 먹으면 계속 먹어야 하기에 3일마다 병원과 약국에 가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가득 찬 대기실에서 몇몇 사람이 쉬지 않고 깊은 기침을 내뱉으면 오히려 다른 병까지 얻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증상에 맞는 약을 발견해서 그 약으로 버틴다. 이제 이 정도는 3일의 전조 증상, 4일 정도의 깊은 고통, 5일 정도의 회복기를 거치면 낫겠구나 하는 식의 개인 방식도 생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나, 평소와 다른 고통이 찾아오면 병원에 가지만 소소하게 자주 아픈 사람에겐 일일이 병원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견디기 힘들 땐, 쉬어야 한다. 나도 이 글을 마치면 바로 이불속에 동굴을 팔 예정이다.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이 될 때까진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이다. 지금은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 이러한 시간도 나에겐 쉼이라서 정신적 회복에 도움이 된다. 운동을 시작했어도 여전히 골골대는 스스로를 보며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픈 횟수가 많이 줄지 않았냐고, 이런 때도 있는 거라고 토닥이고 싶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보다가 가수 '크러쉬'가 바쁘게 일을 마친 뒤에 쉬는 게 어색하다, 번아웃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묻는 장면이 나왔다. 함께 술을 마시면 정신과 의사는 자연스레 이렇게 답했다. 

  "한마디로 답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번아웃이 온다는 게 날씨에 비유를 많이 하거든요. 날씨에도 사실 우리가 개입을 할 수 없잖아요. 기분도 그렇거든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기분이 어떨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행동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내가 그런 행동을 해서 내 기분이 나아질 수 있으면 그런 행동을 내가 해볼 수 있으니까."


  이 말이 정신적 문제뿐만 아니라 육체적 문제에도 해당된다면 어떨까. 우리 몸의 상태도 날씨와 같은 것이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갑자기 몸이 아플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날씨 탓을 하기보단 날씨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이 나타내는 날씨, 날씨에 맞는 옷차림과 행동을 하기 위해 날씨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날씨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맞는 운동 찾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