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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Oct 22. 2023

퇴직해도 괜찮아

언제나 서로의 편이 되어 주자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_김사인, <조용한 일>



남편을 처음 만난 곳은 교회였다. 같은 교회 청년부에 다녔지만 교류가 거의 없었다. 남편과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도 달랐고, 예배드릴 때 주로 앉는 자리도 멀었고, 집의 방향도 달랐다. 인사도 거의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남편은 카키색 롱 패딩에 파란 운동화, 청바지 재질의 크로스 백을 메고 다녔다. 항상, 늘, 매일. 운동화는 뒤축이 다 닳아 있었고 가방은 어머니가 안 쓰는 걸 중학생 때부터 물려받아 쓰던 것이었다. 지갑은 군대에서 쓰던 걸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다 닳아서 바람 불면 지폐가 날아갈 것 같았다. 야근이 잦아 눈은 빨갰고 크로백에 안 들어가는 물건은 검은 봉지에 덜렁덜렁 들고 다녔다.


  다른 대학을 나왔지만 같은 동아리를 했는데 졸업 후 동아리 학사모임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교회에서 봤다는 이유로 옆자리에 앉았다. 홍대 앞에서 하는 모임에 갔는데, 까만 피부에 사투리를 쓰고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옆자리에 앉는 오빠라니. 나는 웃으며 인사했지만 남편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집으로 갔다. 혹시라도 지하철을 같이 타자고 할까 봐 빠른 걸음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역으로 향했다. 그런 남편에게 처음 호감이 생긴 건 '헌혈의 집'에서였다. 당시 청년부에서 위급하게 수혈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헌혈증을 모으고 있었는데, 선뜻 기쁜 마음으로 헌혈을 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이후 여러 명이 같이 가기로 했던 미술관에 사람들이 다 빠지면서 둘만 가게 되었고, 되지도 않는 개그를 하는 남편이 웃겼다.


  남편은 나에게 다양한 선물을 해주었는데, 하나도 내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헌혈을 하고 받은 어린이용 목베개, CD가 없는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 삽화집, 군대 도장이 찍힌 책, 중국 여행 기념으로 사 온 아주 무거운 청동 거울, 밤골목도 무섭지 않을 정도로 장대같이 두꺼운 장우산 등이었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마음이 열린 건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 탓이었다. 본인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나에게 전달하고 싶은 속뜻과 손 편지가 와닿았다. 높은 산에 오르면 빈 페트병에 산소를 담아 오고, 서울 길은 낯설 텐데 약속 한 시간 전에 미리 와서 주위를 다 둘러보고 데이트 코스를 정하고, 언제나 허허 웃으며 매사 둥글둥글 넘어가는 태도가 내 마음까지 편안하게 녹였다.


  지금도 나는 남편에게 많이 배운다. 화가 나거나 걱정에 사로잡히거나 손해 보는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남편이 "괜찮아"하고 말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발이 불편한 구두를 신고 예뻐 보이는 원피스만 입다가 운동화를 처음 산 것도 남편 덕이었다. "편한 게 제일 좋고 예뻐. 추울 땐 무조건 따뜻하게 입어"하고 내뱉는 당연한 말들이 나를 다독인다. 남편은 노숙자에게 옷을 벗어주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후원하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당시 선물 받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이 토끼 인형


  남편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연애할 땐 좋아 보였던 나와 다름이 결혼 이후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자유로운 영혼인 남편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무계획적인 행동이나 선택이 나를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회사에서 희망퇴직 권고를 받았을 때도 남편은 아무 계획 없이 무조건 회사를 나오고 싶어 했다. 퇴직금으로 대출도 갚고 여행도 다니며 여유를 즐기길 원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내 눈엔 어린아이들이 들어왔다. 외벌이에 아이들도 어린데 아무 대책 없이 회사를 나오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같이 가겠다는 마음으로 남편의 뜻에 동의했다. 애초에 우린 무언가를 가져서 부부가 된 것도, 훌륭해서 부모가 된 것도 아니다. 서로 돕고 위하고 지지하는 것, 평생 서로의 편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으니 당연한 선택을 하기 위한 고충을 겪은 것이다.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언제나 퇴직의 기로에 서 있다. 오늘 회사에서 원하는 자격증을 따고 진급 시험을 보지만 내일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상사의 입맛대로 나오는 성과 평가가 두렵고 이유 없이 남편이 미울 때도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로 영미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거트루드 스타인은 그의 시 <해답>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해답이 없는 게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희망퇴직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해답이다. 답답한 마음도 고민하는 시간도 해답이다. 이 해답들이 모여 우리의 길이 될 것이다. 나는 '내 발의 등불'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데, 먼 길을 비추는 커다란 빛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한 걸음 한 걸음을 비추는 작은 빛이 나를 이끌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199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작은 순간들을 사랑한 작가였다.


"별들의 시간보다 벌레들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_<선택의 가능성> 중에서


청담대교에서 보이는 한강과 서울타워


  우리에게 '직업'은 생계를 위해 필요하지만 인생에 꼭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리석음과 예외와 사려 깊은 친절이 우리를 더 풍요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오늘과 내일이 다를지라도, 그저 조용히 내리는 나뭇잎에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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