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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Jun 28. 2024

예약은 안 받고 이상한 걸 합니다 (1)

민박집의 문화예술 실험기 1. 쓸모없음의 쓸모


  나는 민박 주인이다. 민박 주인은 민박을 잘 가꿔서 손님을 받으면 된다. 홍보를 열심히 해서 만실 가까이 채워야 한다. 유일한 생계수단이니까. 성수기 앞두고 긴장감 도는 초보 사장은 어쨌든 이 민박에 사활을 걸고 일을 해야 한다. 딴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자꾸 딴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종종 예약을 닫는다. 숙박객 대신 근처에 사는 사람들 삼삼오오 불러서 열심히 딴짓을 한다. 돈 벌어서 얼른 대출 갚아야 하는 마당에 이게 무슨 배부른 짓인가. 그런데 그 딴짓을 좀 더 키워보고 싶다. 떠들썩하게는 또 싫고 소곤소곤 재미나게. 참으로 무용한 일이다.


과감하게 멈춘 시간의 틈으로


  대학교 1학년 때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다. 경제적 뒷받침 없이 서울에서 공부를 하며 살아남는 일은 마치 끊어질듯한 외줄을 타는 곡예에 가까웠다. 공강시간에는 학교 도서관 보존서고에서 일했고, 밤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사는데도 돈을 모을 수 없었다. 자취방 월세와 관리비, 개척교회를 하는 모부의 생활비를 보태고 나면 우스울 만큼 남는 돈이 없었다. 밤이 되면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도시를 터벅터벅 걸으며 반지하 셋방으로 향하는 길에서 내 인생이 땅밑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방학 동안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를 가는 동기들의 모습이 내게는 닿지 않을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가까운 이들의 걱정 없는 씀씀이에 나는 박탈감을 느꼈다. 커피 한 잔 값 없는 게 들키기 싫어 두 끼니를 포기해야 했던 날, 스타벅스에 마주 앉아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넉넉한 포기 앞에 그날의 배고픈 속이 뒤틀려 서러움에 복받쳐 울던 밤도 있었다.


그 당시 내 삶에 안정감을 주는 것은 비상시에 꺼내 쓸 수 있는 수중의 현금이었다. 내일이 오는 걸 불안해하며 당장의 현금을 비축하기 위해 사는 삶에서 진로를 꿈꾸는 장기적인 안목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나만의 취미나 취향을 찾고도 싶었지만 그런 일은 내게 당장의 현금을 안겨주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눈먼 돈이 나가는 일이었다. 그 모든 소비를 '사치'라고 고깝게 여기며 자위했다. 마음을 피폐하게 갉아먹는 부질없는 노력으로 1년을 보냈다.

  2학년 봄학기 희곡론 강의에서 자신을 "가난한 연극 연출가"라고 소개하는 교수가 낸 첫 과제는 연극을 보고 감상문을 내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내돈내산 티켓을 들고 대학로 지하 소극장 구석에 앉아 연극을 봤다. 공장식 축산으로 광우병에 걸린 소 다섯이 주인공이자 등장인물의 전부였던 극이었다. 기괴하고 낯설고 신비롭고 아팠다. 내 몸의 어떤 눈이 와짝 떠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동안은 오로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매진하는 학문에 불과했던 문학이, 돈도 안 되는 무용(無用)한 예술이, 불쑥불쑥 내 삶에 틈입해 나를 자꾸만 흔들어 깨웠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고유한 존재의 삶이 있다고 말을 걸었다.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던 도서관 보존서고에서 오래된 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의미를 다 알 수 없는 문장과 길들여지지 않는 시의 불편함이 주는 묘한 위로가 좋았다. 아르바이트 가는 길목에 있던 무료 미술 전시관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는 일이 좋아 부러 일찍 집을 나서는 일이 잦았다. 주말에는 학교 앞 놀이터에서 열리는 사운드박스의 버스킹에 소심하게나마 몸을 흔들었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자기 연민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연극 소극장을 찾아갔다. 학교 정문에서 273 버스를 타고 대학로로 가는 길은 사념이 넘쳐흐르는 시간이었다. 당시에는 평일 저녁 공연 중 당일 팔리지 않은 남은 티켓을 일명 '후려친' 가격으로 팔았는데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사치라고 고깝게 여기던 일들에 돈을 쓰는, 나로서는 대담한 용기 덕분에 만난 체홉의 연극과 기발한 실험극들은 흑백이던 내 마음에 색을 입혔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고 혼란스러워야
사유가 발생한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예술을 향유하는 날이면 먹고사니즘 트랙을 정신없이 달려가던 내 일상에 크고 작은 균열이 생겼다. 시를 쓰고, 커다란 전시관을 천천히 걷고, 컴컴한 지하 소극장에 앉아있는 잠깐의 시간들, 내 일상을 잠시 멈춘 시간의 틈으로, 시들어있던 감정과 욕망과 꿈들이 고개를 들었다. 생존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잠시 내려 그 컨베이어 벨트를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 치명적인 혼란함과 아픈 성찰을 데려왔다.


내가 처한 현실과 앞으로의 삶, 이 세계에 관한 서툰 사유가 시작됐다. 혼자 자취를 하며 월세를 감당하는 일, 학자금 생활비 대출까지 받아가며 모부의 생활비를 보태는 일,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한 공부,  생존하기 위해, 착한 딸이 되기 위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했던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혼란한 생각과 마음은 불편하고 낯설고 아프지만 그 부대낌을 통해 나의 자아정체감이 조금씩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위로받는 것, 내가 원하는 것들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일, 물론 예상치 못한 삶의 국면에서 헝클어진 결과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내 삶의 궤도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행동에 옮겨야 했다. 방 두 개 셋집을 구해 다섯 명이 월세를 나눠내며 미묘한 감정싸움의 전쟁터를 아슬하게 건너본 일, 휴학 기간 동안 개미처럼 돈을 모아 외국으로 훌쩍 떠나 1년간 '가난하게' 생존해 본 일, 학교 소극장을 빌려 극을 올리느라 학점이 와르르 무너진 일, 행실의 변화로 모부와 다툼이 잦아진 일, 그러면서 우는 날이 많아지기도 한 숱한 시행착오들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근력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도 살 수 있다고 등을 밀어주었다.


쓸모없음의 쓸모


  민박을 더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남편은 올 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 혼자 육아와 민박운영 둘 다 하기에는 체력이 달려서 예약일을 닫아놓는 날이 많았는데 남편이 붙으니 예약을 더 받을 수 있어 매출이 늘었다. 하지만 향후 3년간은 번 돈 대부분이 민박 지은 대출 갚는데 쓰일 예정이다. 그나마도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던 건 나의 육아휴직 급여인데  두 달 전 회사의 갑작스러운 폐업과 동시에 지급이 종료됐다. 그래도 서울에서 살 때보다는 기본 생활비가 훨씬 적다 보니 아껴 살면 못 살 일은 전혀 아니지만, 매출달성에 쫄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이토록 '정신 차리고 바짝 벌어보자 퐈이팅'해야하는 마당에 난데없는 딴생각이라니 어쩌면 무책임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건 당연지사다.  


나무 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을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버티어 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 김훈

  사실 나는 생산성과 성과에 매몰되어 가는 링 위에서 애저녁에 나가떨어져 나왔다. 나는 내 생계에 기여하지 않는, 시간만 축내는 것 같은 무용해 보이는 일들이 내 존재를 어떻게 지탱해 주는지 알게 됐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탈 서울'을 시도할 수 있었다.  소소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찾아온 이곳에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다양하게 실험하고, 이웃들에게 전파하고 함께 누리고 싶다. 큰돈을 벌지도 못하고, 출세를 하지도 못하는 일들이겠지만 그렇기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딴짓이 좋다. 그래서 종종 예약을 닫고 이웃들과 책을 읽고, 음식을 나눠 먹고, 영화를 보고, 그림도 그리고 우리만의 작은 축제도 열고 싶다. 매출은커녕 내돈내산으로 하게 될 이 무용한 일들이 이 작은 민박집에 가져다 줄 자잘한 파장은 어떤 모습일까. 벌써부터 궁금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에 활력을 준다. 수익성 제로의 문화예술실험을 시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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