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의 문화예술 실험기 2. 적자를 무릅쓸 가치
내 가난은 쉽게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다녔다는 건 굉장한 특권이었다. 지금은 '청년'지원 사업이라고 하는 것들이 당시만 해도 '대학생'에 국한된 게 많았다. 대학생이 아닌 청년들은 받을 수 없던 정보와 혜택들을 나는 당연스럽게 받았다.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도 이력서에 적힌 학력 한 줄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랐다. 자차가 없어도 대중교통으로 서울 곳곳을 다니며 문화예술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20대 대학생으로 살 때는 그 모든 것이 공기처럼 당연했고, 그 당연함이 불평등한 권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출산 후 전업주부가 되어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고, 유아차를 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운신의 폭이 줄어드니 당연했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아 졌다. 부끄럽지만 처음으로 교통약자와 장애인이동권, 사회적 고립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납작한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서 발버둥 쳤다. 뜻과 결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공동육아를 하고,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청년프로그램은 될 수 있으면 많이 참여했다. 눈여겨봤던 출판사나 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강좌와 책모임 등에 참여하고,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축제에 열심히 참여했다. 서울을 떠나서야 알게 된 건 서울은 참 갈 곳도 많고, 모임의 기회도 많은 데다 어느 정도 익명성도 보장되는 안전함을 가진 도시라는 사실이다.
서울을 떠나기 전 어느 날 느린이 물었다.
"너는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가만 생각해 보니 산도 바다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나는 도시의 야경이 좋아"
서울은 내게 해방의 도시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가족의 간섭으로부터, 친구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낸 외로움으로부터,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신입생 때는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서울을 누비고 다녔던 것 같다. 힘들 때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렸고, 늦은 밤 한강 둔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상수동 강변에서 바라보는 건너편의 반짝임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바 3개를 뛰어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원룸 월세와, 갭 투자자로 인한 전세사기와, 곰팡이와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도 처음으로 연극 무대를 만들고, 오르고, 기자로서 세상 어두운 곳곳을 들여다보고, 연대하는 사람들을 벗 삼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첫 아이를 낳고 6년을 기르고, 둘째를 임신했다.
고성에 오기 전 경북 김천에서 2년 정도 살았다. 김천 생활 1년이 지나는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적응을 못했다. 이사하자마자 둘째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매일 도래하는 아들 둘 육아의 힘듦이 가장 큰 이유였고, 친구가 없다는 게 두 번째, 정치색이 분명한 소도시의 갑갑함이 다음으로 어려웠다. 어린 시절 나름 시골에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서울과 가까운 김포였고, 나는 수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김천에 가서야 체감했다. 서울살이 힘들고 버겁다고 투덜대던 나였지만, 그간 내 생활방식과 영혼은 너무 도시 생활에 물들어 있었다.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대학 병원이 세 군데나 있던 곳에 살다가 만삭으로 김천에 내려갔더니 분만이 가능한 산부인과가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 의뢰서 받고 구미에 있는 대학부속병원에 찾아갔다가 너무 작은 크기와 낡은 외관을 보고 신뢰감이 떨어지는 나 스스로가 우스웠다. 버스와 지하철이 분 단위로 다니던 곳에 살 때는 그게 편한지도 모르고 그냥 살았는데, 시내 직선도로만 버스가 다니고 그 외곽은 무조건 택시나 자차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2년 동안 차 없이 어찌어찌 살긴 했는데 고성에서까지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 막판에 중고차를 구매했다.
김천에 직지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다. 울창한 숲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절인데, 그 주변에 넓은 공원이 있어서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외곽으로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시원한 계곡도 있었다. 미세먼지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청정한 산지였다. 아이들과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서울에서 누렸던 전시와 공연, 커뮤니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김천에는 새로 조성된 혁신도시에 작은 영화관이 하나 있었고, 시에서 운영하는 예술극장에 1년에 한두 번 뮤지컬 번개맨에서 지역순회공연을 왔다. 아이들의 관람권을 위한 부모들의 선착순 싸움이 치열했다.
아이들에게 조금 더 풍성한 문화예술·사회 경험을 시켜주고 싶을 때면 KTX를 타고 서울로 갔다. 대학로에서 연극도 보고, 국립박물관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비건페스티벌도 가고, 수만 명이 모인 기후정의행진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도시를 찾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도시를 배회하다 보니 살고 있는 지역에 애정을 느끼기도 힘들었다. 서울을 동경하며 지방생활을 버티는 삶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런 상황에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는 좀 더 외향적인 남편 느린 덕에 조금씩 지역 안에서 소소한 관계들이 생겨났다. 나처럼 서울 살이에 지쳐서 온 또래 이웃들이 꽤 있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목공방을 운영하는 목수, 지역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모인 예술가들을 시작으로 새로운 직장에서 청년들을 만나고, 용기 내서 가입한 여성축구모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천 유일의 비건 카페, 김천 유일의 제로웨이스트 가게 등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몫의 노력을 하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다. 신세 한탄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지고, 나도 뭐라고 직접 해보고 싶은 마음이 심겼다. 그 마음을 가지고 고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작년 2월 고성으로 이주한 후 3월부터 격주 목요일마다 꾸준히 책모임을 나가고 있다. 속초 독립서점 완벽한 날들에서 7년째 이어지고 있는 독서모임 '가벼운 나날'이다. 가벼운 나날 언니들이 없었다면 아마 난 김천에서처럼 고립감에 허덕이며 서울만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안전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서울이 아니어도 풍성한 삶을 향유할 수 있으며 서울을 떠남으로써 열린 다양한 삶의 실험과 경제적 자유로움(상대적이지만)을 볼 수 있게 해 줬다. 이 모임은 책 한 권으로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더불어 물리적 생산성이라고는 없는 그 시간이 주는 깊은 사유와 연대가 삶을 어떻게 해방시키는지를 매번 체감시킨다.
고성과 속초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주말이나 휴가철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관광 위주의 콘텐츠는 많지만 정작 주민들을 위한 문화 예술 기회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문화예술회관이나 큰 전시관 등 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공연이나 전시 프로그램이 부족해 수도권에 비해 시설 이용률이 떨어진다는 문체부 보고도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지역에 애정을 갖고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의 기회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 말한 완벽한 날들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향한 섬세한 애정으로 직접 큐레이션 한 책을 서점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제안한다. 동네 주민들도 문턱 없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공연과 북토크, 희곡 읽기 등 다양한 행사를 세심하게 준비한다.
재작년에 문을 연 고성문화재단에서는 고성 주민들이 직접 문화의제를 발굴하고 제안하면 지역의 예술가와 협력해서 다양한 문화예술실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나도 문화재단 사업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작게는 원데이클래스부터 연극공연관람, 축제 등 수혜자로 참여하기도 하고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안해 지원금을 받아서 진행한 사업들도 있다. 지원사업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고성 지역의 이슈를 문화적으로 접근하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올해는 최근에 칠성조선소에서 열린 아트페어, 시민들이 주도해서 아이들을 위한 전시를 연 밤송이 프로젝트, 작은 공방과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플리 마켓을 연 테일, 고성공예주간 등 작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아이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만들고 실천하는 움직임을 더 많이 발견하고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나는 다양한 정체성, 다양한 지향, 다양한 고민, 다양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고유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물리적·정서적 공간을 원한다. 서울에서 누렸던 다양하고 안전한 모임과 공간들을 이곳에서 나도 실현해보고 싶다. 익명성이 보장되었던 서울과 다르게 여기서는 서로가 한 다리만 건너면 연결되어 있어서 뭔가를 시도했다가 부정적인 말들이 돌까 봐 지레 겁이 날 때도 있다. 끼리끼리가 아닌, 어느 한쪽으로만 자꾸 포섭되는 문화예술이 아닌 무언가를 작게나마 열어보고 싶다.
내가 가진 자원은 서울에서 기자와 활동가로 일하면서 얻은 인맥과 기획경험, 그리고 현재 운영하고 있는 '민박' 공간이다. 이 세 가지는 자원이기도 하지만 한계점도 분명하다. 서울 인맥은 일단 물리적 거리로 인한 지속가능성의 한계가 있다. 기획 경험은 서울 즉 '도시'를 기반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고성을 잘 모른다. 민박은 2시간짜리 모임을 한다고 해도 하루 예약을 닫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매출과 생계로 직결된다. 게다가 내돈내모(내가 돈내서 내가 모은다)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 따로 공간을 열 돈과 여력은 없고, 민박집에서는 꼭 숙박만 하라는 법은 없다. 11평짜리 자그마한 오두막이라 많은 사람이 올 수도 없다. 그리고 나의 문화적 취향(혹은 지향)은 좀 마이너 하다. (비건, 글쓰기, 연극, 기후위기대응, 반전(Anti-war) 등) 그래도 작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문화예술 경험을 열어보고 싶다. 그렇게 시작된 게 바로 '고유살롱'이다.
고유살롱에서 벌써 세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4월 비건테이블, 5월 죽음의 바느질 클럽, 6월 헌 옷 새로고침.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차근차근 풀어보려 한다.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이웃 어르신들을 위한 리마인드 웨딩, 소규모 비건페스티벌 등도 열어보고 싶다. 그래도 7-8월 성수기는 열심히 숙박업 본연의 일에 매진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