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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May 31. 2020

감각만 남은 것처럼

푸에르자부르타

어두컴컴하고 공허로운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미 공간을 채운 사람들의 웅성임으로 가득하다. 강렬한 색깔의 조명들이 한쪽 벽면을 밝히고, 여기저기서 주인공들이 돌출하듯 웅성대던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침을 꼴깍 삼킨다. 정적이 흐른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뭐지? 이게 뭐지? 아주 미세한 빛에도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공간의 중앙을 가로질러 거대한 러닝머신이 자리를 잡는다. 서서히 꼭대기로 오르던 이가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트랙 위에 착지한 그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를 향해 다가오던 장애물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들이 공간 가득 퍼진다. 그것들이 부서질 때마다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깨지고 부서지는 것들이 이토록 아름다워도 될까? 산산이 부서지기 전 장해물과 달리는 사람이 마주칠 때, 마치 내가 그것을 때려 부수는 것 같은 타격감이 느껴진다. 부시고 또 부신다. 통쾌해진다.

천장이 내게로 다가온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천장이다. 사람들이 손을 들면 닿을 수 있는 높이에 멈춰 선다. 잠시 전까지도 천장이던 것이 수면이 된다. 나는 물속에 잠긴 채 수면 위를 바라보는 자가 된다.  수면 위로 저마다의 몸을 던져 물결과 파장을 일으키는 인간들이 이리저리 미끄러진다. 투명한 장막을 두고 누군가는 아래를, 누군가는 위를 향해 손을 가져간다. 마치 서로의 손을 탐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만지고 싶다. 하지만 만질 수 없다. 그래서 서로를 더 갈망한다. 통제를 필요로 할 만큼 무아지경에 이른다.

상공은 무한해졌다. 천장을 뚫고 누군가는 저 높은 곳에서 닿을 수 없는 지상으로 손을 내민다. 잡아주고 싶지만 닿을 수 없다. 마치 서로를 원하는 소망을 이뤄주듯 수직적인 통로가 열린다. 그들은 무리를 향에 몸을 던진다. 공기의 저항을 버티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다.  

모두가 뒤섞인다. 파티가 시작된다. 익숙한 파티가 펼쳐진다. 주인공과 객은 경계를 풀고 함께 뛰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뛰어대기 시작한다. 스토리 없고. 캐릭터 없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 예측할 수 없고 오직 감각만이 남게 된다.


의식은, 잠시 꺼두셔도 됩니다.





다 쓰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열정이 생기면 그 열정을 다 쓰고, 무기력이 생기면 그 무기력을 다 쓰고, 행복이 생기면 그 행복을 다 쓰고, 외로움이 생기면 그 외로움을 다 쓰는 사람들. 낯설다는 것 때문에 조심스러워하지 않고, 다음을 위해 일부를 덜어 쟁겨두지 않는다. 그렇게 매번 빈털터리가 되어 또 다른 무엇을 담대하게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서사가 생겨나는 것 같다. 


다 쓰고 살자. 
열정, 무기력, 행복, 외로움, 
그게 뭐든 지금 뿐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순간이란. 
쓴 것과 쓸 것이
내 것이라는 건 '착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탈탈 털어 넣고 난 자리에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이 차 오른다. 모두 비워내지 않으면 그 바닥을 알 수 없다. 생각보다 깊은지 아니면 얕은지, 바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까지도. 우리의 의식은 단지 '소진을 지양한다'는 싸인만을 보내왔을 뿐이다.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내일과 미래가 마치 반드시 오고 마는 자신의 소유물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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