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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17. 2020

결핍에 상응할 열정

잃어버린 20대의 귀환

내 삶에서 뭔가를 통째로 스킵한 것이 있다면, 그건 '20대의 풋풋함으로 누리는 열정적인 유희'였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좀 더 자기 계발에 힘썼다면'이라든가 '지금과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과 같은 성취지향적 관점에서의 아쉬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을 거라면, 그 시절에는 좀 더 젊음을 누리며 놀아볼 것을 그랬다'든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 속에 더 많이 있어볼 것을 그랬다'라는 아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갔다. 몸소 겪어내지 못했던 것들, 그건 내게 있어서 '결핍'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여러분, 즐거워요?
즐거우면 소리 질러!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질렀다. 내 몸에 다리가 달려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진동하는 드럼 비트에 맞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미 수십 번은 족히 들어 외워 버린 곡의 특정된 제스처를 수많은 관중과 합이라도 맞춘 듯 취하며 연주하는 곡들을 따라 불렀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고, 뻥 뚫린 야외와 대규모 공연장은 물론 소극장스럽게 협소한 공간과 길거리에 이르기까지 '일말의 새로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약 8년에 걸쳐 100번에 육박할 횟수를 말이다. 태생이 안 하면 안 했지 '중간은 없는' 인간이라 나조차도 나를 말릴 수 없었다.  



아마 1000만원은 썼을 거다
티켓값에, 차비에, 식비까지 하면
-
잃어버린 20대를 재구매하는데,
그 정도면 1일당 3000원도 안돼
싸게 먹혔구먼

    


굳이 계산하자면 2,740원쯤 되었다. 뭐 그게 다 일까 싶지만. 하지만 그렇게 미친 듯이 몰입했던 것은 '현실의 압박에 굴복당한 내 청춘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렇게라도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에 대한 보수공사를 하지 않으면, 어느새 나이 들어 버린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늦어서 그런 보상조차도 누리지 못할 정도로 내 몸이 쇠하기 전에 한 번쯤은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늦바람이 무서운 줄 모른 채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여러 군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더없이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예전의 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젊음들과 마주했을 때 "그래도 지금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누려라"라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의 건너편에 서서 수영을 해 보라고 외쳐대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 그 시절의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당찬 기세로 자신만의 길을 열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존경스러운 청춘들. 


나와 유사한 연령대와 이유로 그곳에서 함께 열광하는 사람들과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결핍이 가진 보편성에 위로를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현실로 뛰어든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현실 속에 뛰어들어 살아온 이들도 있고, 내가 조금은 숨 쉴 틈을 찾은 지금까지도 과거와 다름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씩씩하고 담대하게 오늘을 보내고 있었다. 과도하게 보상을 갈구하는 '자기 연민'이 내게서 툭 떨어져 나갔다. 이젠 네가 필요 없다. 


반면,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누릴 수 없을 것 같은 그 보상은 유효기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몸을 다 바쳐 뛰지 않아도 먼발치에서 여유롭게 음악을 즐기며 한껏 미소를 머금은 인생 선배들이 나와 같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결핍을 채운다는 일념으로 발악하지 않아도 저마다의 그릇을 채우는 법은 따로 있었다. 삶을 데우는 데 있어서 항상 뜨거움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따뜻하기만 해도 족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멈춰 설 지점을 추정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 시점이었어야 했을 뿐이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어둠 속에 한낮 실루엣에 지나지 않은 몸짓으로 서 있을 뿐, 그들의 나이와 삶은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다.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팬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지만, 멀찌감치 앉아서 무대를 관망하며 떼창 하거나 페스티벌이 무르익은 저녁 즈음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한강 주변을 배회하며 맥주 한잔을 손에 들고 좋아하는 밴드의 이름을 외친다. 그들의 가까이에 서거나 온몸으로 연주하는 멜로디를 받아내지 않아도 충분한 것을 보니 어느새 나의 결핍은 채워진 모양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이제 외쳐본다. 


아이 러브 락앤롤,
잃어버린 시간 복구 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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