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버튼을 눌렀다. 딸깍. 클릭 소리와 함께 나는, 나만의 녹음 부스에서 우리 집 거실로 순간 이동했다. 모든 게 얼어붙어 있는 것만 같았던 시간이 지나가고 가라앉은 밤의 무드가 돌아왔다. 후우, 참았던 숨을 크게 쉬었다. 마이크와 노트북, 태블릿에 띄워진 원고, 그리고 나. 그곳에는 우리만 존재했다. 마이크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한참 멍하니 있었다. 간접 조명 빛이 마이크 가장자리에 부딪혀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제야 자세를 고쳐 앉았다. 7분 35초. 첫 에피소드 녹음을 마쳤다. 드디어, 했다! 그것도 한 번에 끝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번에는 깊은숨을 쉬었다. 복식 호흡을 연습할 때처럼 있는 힘껏 배를 부풀렸다가 남김없이 뱉어냈다. 오디오 파일로 변환된 내 목소리를 20년 만에 만나려니, 명치가 간질거렸다. 클릭 한 번이면 끝날 일인데, 차마 누르지 못하고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어색하면 어쩌지? 오글거리면 어째? 도저히 못 들어줄 지경이라 이어폰을 집어 던지는 거 아냐? 또 또, 성격 나온다. 그냥 틀어. 성에 안 차면 다시 하면 되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연습하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배경음악 깔지 뭐. 졌다, 졌어. 누가 말리겠어. 이 유난스러운 성격을.
며칠에 걸쳐 오프닝 음악을 얹고 최종 파일을 완성했다. 그리고 나는 돌변했다. ‘망설임 따위 다 던져버려!’ (맞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멘트를 순화한 버전이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각. 연이은 주말 근무에 피로가 겹겹이 쌓여 졸음이 쏟아졌지만, 다음날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무조건 지금이야! 홀린 듯,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을 열어 채널 승인 신청에 나섰다. 채널 소개, 대상, 시작 이유, 채널 운영을 통해 얻고 싶은 것…. 차근차근 채우고 마지막으로 오디오 파일을 첨부했다. 가입 신청 완료. 이제 승인 메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날 새벽. 침대에 누워 뒤척였다. 완수해야 할 과업을 드디어 마쳤는데 홀가분하지 않았다. 되레 간절함에 마음 졸이던 지난 시간이 허무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던가. 바삐 움직이게 만드는 어떤 부스터가 내 몸에 장착된 양, 몇 주 만에 끝내버릴 수 있는 일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그동안 왜 그리 망설이고 또 불안해했을까. 해버리면 다 해결될 것을. 후회인지, 원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날이 밝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또렷해져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기다리던 메일이 도착했다. 일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준비했으니까 당연히, 단번에, 승인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수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럼 그렇지. 세상사 쉬운 일은 없었다. 얼마나 자주 좌절했는데, 이쯤이야! 씩씩하게 부족한 부분을 고쳤다. 꿈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씩씩하게 승인을 재요청했다. 어느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고칠 수 있다는 씩씩한 마음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20년 만에 기어코 마이크 앞에 선 내가, 그제야 기특해졌다.
안녕하세요, 김 작가입니다. 시작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마침내 해보자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는 그 순간 말입니다.
시작의 순간은 아무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시작이 무척이나 쉽고 간단한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다른 누구에게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긴긴밤 잠 못 이루고, 수없이 망설이고, 앞서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잃고,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포기하기를 여러 번. 그렇게 많은 걱정과 망설임을 물리치고 기어코 움직였을 때 맞이할 수 있는 첫걸음, 바로 시작의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꽤 여러 번 시작의 순간을 맞았지만, 오늘은 더욱 특별합니다. 마음 깊숙이 접어뒀던 꿈을 꺼내 펼쳐 보이는 날이거든요.
어느 때보다 벅찬 시작의 순간.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내 안의 나와 얼마나 자주, 오래 싸웠는지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시작하고 봤던 예전의 저는 너무 많은 걸 아는 어른이 됐거든요.
할까? 말까? 할 수 있을까? 괜히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어쩌지? 시작도 하기 전에 결과를 예측하고 통제하고 싶었나 봅니다. 아니,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걸음도 떼지 못한 주제에 성공을 바랐다니, 욕심이 너무 과했죠?
왜 이러는 걸까요. ‘시작의 기술’을 쓴 개리 비숍은 말합니다. “당신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고 있다. 당신은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들을 알고 또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확실성과 편안함만 붙잡고 있다가는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과 위험 부담 없이 성공이 오는 법이 없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시작의 순간 없이는 발전도 성공도 없다는 이야기죠.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비우고 그냥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영감이 차오르고 온 우주가 나를 위해 움직여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별한 시작의 순간을 함께할 책으로 어떤 게 좋을까 생각했는데요. 고민할 것도 없이,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가 떠올랐습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시작을 주저하지 않고 등단해 40년간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했던 작가 박완서.
특히 마음이 머물렀던 글은 ‘꿈’이에요. 작가는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우연히 여학교 시절 살던 집을 지나게 됩니다. 마침 하교 시간이었는지 여고생들도 그 앞을 지나갑니다. 옛 모습 그대로인 집과 그곳을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작가는 괜스레 서러워집니다. 그 집에서 많은 꿈을 꾸었던 십 대 소녀가 떠올랐거든요. 그리고 말합니다.
‘숱한 꿈은 자라면서 맞닥뜨린 현실에 혼비백산, 지금은 그 편린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작가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시간을 쪼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혹여나 계획대로 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리고 깨닫죠.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급급해 꿈꾸는 일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요.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 소녀 적에 살던 집 앞을 지나면서 울고 싶을 만큼 센티한 감정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나에겐 꿈을 꿀 희망이 있다.’
어릴 적 제 꿈은 아나운서였습니다. 글 쓰는 일도 좋아해서 기자가 됐지만, 언제고 한 번은 마이크 앞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걸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괜찮다’고 스스로 속였지만, 그럴수록 심통이 났습니다. 불만이 뻥 터져버릴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왔어요. 출판 계약을 하게 됐거든요. 다른 걸 도전해봐도 되겠다, 막연한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제 책을 직접 낭독해보고 싶어졌어요. 마이크 앞에서 직접 쓴 글을 낭독한다고 생각하니, 지루했던 일상에 생기가 돌더군요.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상상하니, 정말이지 그랬어요. 행복했어요. 처음 녹음할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면서요.
지금 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기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습니다. 참 많이 망설이고 좌절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만 앞세우다가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꼈죠. 포기하고 살던 대로 살려고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안 되더군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 살 것 같았어요.
그래서일까요.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작가의 말이 어쩐지, 어릴 적 꿈에 도전하는 제 마음과 닿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