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공정하다는 착각'
바야흐로 대한민국 위기의 시대다. 경제와 정치 등 여러 요소가 각축장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저출산 문제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계청이 발표한 합계출산율(가임기 여성(15~49세) 1명이 가임기간(15~49)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23년 0.72명이다. 이 수치가 굉장히 낮은 수치임은 은연중에 짐작할 수 있지만 필자의 경험상 많은 사람들이 이 수치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간단한 계산 문제를 풀어보자. 만약 남녀 성비 반반이라는 가정 하에 도합 100명의 인구가 1세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자. 이때 이 세대의 출산율이 0.7명이라고 하면 그다음 세대의 수는 얼마일까? 주변에 지인들에게 질문한 결과 대부분이 70명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답은 35명이다. 출산율이라는 것은 위에 적혀있듯 여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한 세대의 수가 100명에서 약 10명이 될 때까지는 불과 2세대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글로 돌아와 저출산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혹시 그 근본적인 원인이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실적주의(meritocracy)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관련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해당 문제에 작용할까라는 궁금증에서 이 글은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의 실적주의(meritocray)에 대해 분석하고 실적주의가 어떻게 저출산 문제를 만들어냈는지 알아보자.
필자는 저출산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바라보았다. 공리주의의 핵심인 ‘대학’과 ‘변화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이다. 먼저 대학에 대해 다루고 그 이후 가치관에 대해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이어나가려 한다.
Ⅱ. 저출산 문제와 대학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공리주의의 핵심 기관인 ‘대학’은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에도 자주 나올 만큼 실적주의를 논함에 있어 빠질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과연 저서에 나오는 미국에서의 대학과 한국에서의 대학은 실적주의적 측면에서 어떻게 다를까. 실적주의 사회를 기반으로 한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좋은 대학이 하나의 실적이 되기에 추후 좋은 직장과 많은 부를 가질 확률을 키워준다. 또한, 어쩌면 좋은 대학을 나올수록 그 승자에겐 자부심과 오만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바로 진학률이다. 미국은 30%의 학생만이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 반해 한국은 70%가 넘는 학생이 대학에 진학한다. 이는 한국 학생들이 특별히 똑똑해서라기보다는 단지 한국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그래도 대학졸업장은 있어야지’라는 관념이 깊숙이 박혀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선택이 아닌 의무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학문을 공부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본연의 의의는 점차 희미해지고 하나의 금융상품으로써 전락해 버렸다. 여전히 학벌주의가 남아있는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학문 수학을 위한 요소도 아니고, 실적으로도 충분히 기능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위한 기관인가. 만일 앞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과연 그저 대학졸업장의 존재만을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이 소비될 가치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저출산 문제와 이를 연결 지어 보면 앞선 4년이라는 시간은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오늘날 모두가 대학을 가는 세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구직활동을 시작하는 시기가 늦어졌다. 더불어 대학을 나온 만큼 전체적인 취업 희망 수준 역시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됨과 동시에 전체 대학생의 절반 이하가량이 전공을 살리지 못하면서 취업시기 역시 자연스레 늦어진다. 실제로 2021년 관련 조사에서 대졸 취업인원의 평균 연령은 여성 27.3세, 남성 30세로 관찰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결혼 시기는 늦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출산에 육체적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OECD 고소득 국가를 중심으로 소득 수준이 높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더 높아지는 경향성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에서는 소득 수준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증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이후 출산율이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을까? 그 원인으로 유자녀 여성 또는 남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없는 노동시장 환경이 지속되면서, 경력단절을 우려하여 커리어를 유지한 채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여성이 증가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유자녀 여성의 경우 출산 이후 경제활동참가율이 낮아짐에 따라 장기적으로 소득이 66%가량 감소하지만, 유자녀 남성의 경우에는 출산 이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대한민국 청년 여성은 자녀 유무에 따라 서로 다른 경력단절 확률을 경험하고 있을까? 202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30대 무자녀 여성이 출산을 포기하고 무자녀 상태를 지속하는 선택을 할 경우, 경력단절 확률을 최소 14% 이상 줄일 수 있다. 경력단절에 따른 인적자본 훼손과 경력단절 없이 커리어를 지속함에 따라 기대되는 임금 상승을 감안하면, 14% 이상의 경력단절 확률 감소는 개인의 평생 소득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더불어 출산 이후 자녀의 양육에 수반되는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청년 무자녀 여성이 출산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편익의 상승폭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성들에게 현재 출산을 하지 않는 건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대학이 단순히 교육을 하는 기관을 넘어서 더 큰 가치를 가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에 따라 높은 대학을 향한 사람들의 의지와 열망은 커져갔고 자연스레 우리나라에선 전례 없는 초대형 사교육시장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과연 사교육비는 얼마나 지출되고 있을까. 서울의 경우 지난해 참여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가 70.7만 원으로 측정되었다. 아이를 기르기 시작하며 사교육비지출을 시작하는 30대의 평균 월급이 300만 원대임을 감안하면 1명만 해도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또한, 명문대에 들어가는 학생의 대부분이 소득분위 9 분위 이상이라는 점은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앞선 통계이상의 비용이 들것임을 시사한다. 또한, 지금 현재 출산의 가장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90년생 세대는 본격적으로 사교육비가 증가되는 과도기를 겪은 세대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금액만이 문제가 아닌 그 학원과 학교로 점철된 지독한 학창생활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 역시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Ⅲ. 저출산 문제와 변화하는 가치관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야말로 실적주의(meritocracy)의 이상과도 같은 말이다. 동시에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은 필자에겐 굉장히 익숙한 말이다. 미국의 진보파 진영, 그중에서도 오바마 전 대통령이 즐겨 썼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그 실적주의는 어떻게 됐던가. 누구든 평등한 기회 아래 노력만 한다면 그에 비례하는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논했지만 현실은 코인, 부동산 버블 등으로 빈익빈 부익부는 커졌다. 기존의 많은 자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던 재력가들은 가만히 앉아 번 돈은 일반 서민들만을 강조하기엔 너무나 큰돈이었고, 이로 하여금 대중들은 실적과 노력 이 2가지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꼈다. 같은 맥락에서 이로부터 나오는 박탈감과 허탈감은 포퓰리즘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고, 이것이 정치에 대해서는 실적이 전무한 대통령 취임이라는 실적주의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에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 저출산 문제가 실적주의의 붕괴와 포퓰리즘에 대한 분노의 결과냐고 말이다. 물론 그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앞선 것들이 시발점이 되어 우리네가 살아가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환경 자체에 대한 반감을 사기엔 충분했고, 그런 미연한 감정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저출산 문제에 하나의 문턱으로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빠질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가 인터넷과 SNS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서로와 쉽게 소통할 수 있고, 쉽게 지인 및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공유하고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순 일상공유의 목적을 넘어 자신의 부와 사치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향 역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이전보다 실적주의의 ‘실적’과 ‘부’를 남들과 더욱 쉽게 상호 관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자연스레 그들의 삶과 우리의 일상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비교대상이 너무나도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SNS가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비교의 대상이 기껏해야 주변 지인들이었다면 최근에는 비교의 대상이 평소라면 서로의 일상을 알기 어려운 부자나 셀럽 유명인사등이기 때문에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차 고조되면서 필자의 주변인을 포함하여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어차피 다른 이들에 비해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데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실적주의 그 자체에 대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갖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연애도 결혼도 직장생활도 출산도 모두 포기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더불어 우리 사회에 은밀하게 퍼져있는 ‘평균 올려치기’ 문화는 앞선 내용들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이 문화가 실적주의 세상의 승자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패자들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이 문화 역시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저출산과 관련하여 이전과 달라진 가치관에는 결혼에 대한 인식변화가 있다. 이제는 결혼이 '필수'에서 '선택'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한다. 과거 세대에서 결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어딘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나저러나 결혼을 했다. 반드시 좋은 현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이 필수였기 때문에 성향이 결혼 제도와 맞지 않는 사람도 결혼을 했고 서로 잘 맞지 않는 커플도 헤어지지 않고 결혼했다. 개인의 삶이나 가족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이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깨졌다. 적어도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결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뜻이 잘 맞지 않으면 이혼한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은 이들 모두가 확고하게 비혼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 세대의 정확한 심리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하면 좋기는 하지만 더 이상 필수는 아니기 때문에 '정말 잘 맞는 사람'과 '준비된 때'에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과 범람하는 정보는 나와 잘 맞는 사람에 대한 기준을 예리하게 갈고닦는 것을 도와주었다. 개인적 경험뿐만 아니라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력이나 외모는 물론 가치관, 대화 코드, 생활 습관, 가정환경까지 꼼꼼히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눈이 높다기보다는 허용 범위가 좁아진 셈이다. 그리고 결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실적주의는 패자 스스로를 갉아먹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필자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를 보며 패자들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방식으로만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특히 다른 성별이나 다른 세대 등을 향한 막연한 비난과 혐오로서 작용할 수도 있음을 느끼고 있다. 더욱이 익명을 보장하는 인터넷 특성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당장 인터넷 기사나 커뮤니티만 들어가 봐도 남성과 여성, 서로 다른 세대들끼리의 깊은 갈등의 골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Ⅳ. 결론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낮은 출산율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출산율의 반등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정부는 저출산 문제의 대책으로서 물질적인 방법만을 강구하고 있다. 물론 물질적 부족 역시 현재 청년세대의 어려움 중 하나이긴 하지만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듯 여러 가지 교육적 제도와 정치적, 문화적 가치관의 변화가 주요 원인이며 그것들의 근본에는 대한민국의 실적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조금은 해결할 수 있을까.
필자 역시 샌델 교수와 마찬가지로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제비 뽑기로 대입을 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 이유는 샌델 교수와 마찬가지로 승자에게 적어도 지금처럼 오만을 안겨주지 않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게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한국 사회에 뿌리 박힌 반드시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없애 나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대학 수의 축소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샌델 교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각각의 직업에 사회적 존경이 부여될 수 있도록 그 직업의 의미와 역량을 계발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정보를 널리 보급하고 공유하며, 동료 시민들과 우리의 공적 문제에 대해 함께 숙의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서로에 대한 갈등의 골이 극에 달한 요즘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건의 평등’이 우리 사회에 무사히 잘 정착하여 이번 글에서 다룬 저출산 문제 역시 자연스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길 기대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