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각자만의 길을 개척해 걷는다. 각자 나름의 서사를 만들어내며 말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가장 무겁게 내려앉은 능력주의에 따라 남들보다 더 나은 성과 내지는 실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성적일 수도 있고, 대학 간판일 수도 있고, 자격증일 수도 있고, 회사 내 고과일 수도 있다. 남들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필자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2가지이다. 하나는 꾸준하게 또 때론 묵묵하게 자기의 소양을 다 해내는 사람, 또 하나는 나의 꾸준함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그만큼 적어도 필자의 서사에 있어서 ‘꾸준함’이라는 단어는 남다른 무게를 갖는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래도 필자는 남들보다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학창 시절, 나의 본연의 의지보다는 타인 내지는 사회가 요구하는 의지에 따르는 필자의 모습이 있었다. 일전 글(나의 해방일지)에서 언급한 바 있듯 학창 시절 필자는 필자 본인을 잘 몰랐고, 또 그래서 그저 남들의 의지에 따라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갔다. 그 덕에 학창 시절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꾸준히 하는 건 필자에게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저 그 당시의 필자에겐 누군가가,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면이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학창 시절 필자의 꾸준함의 비결은 ‘당연함’이다. 그리고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필자는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당연함’이라고 믿는다. 경험상 지금 아무리 필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필자가 선택한 일을 하더라도 그때만큼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열정도, 책임감도 그 어느 것도 ‘당연함’이라는 단어보다는 무거운 것은 없었다는 뜻이다. 전자와 달리 ‘당연함’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학창 시절엔 당연함을 부여하기가 쉬웠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세뇌가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고, 또 사실 학생 신분으로는 공부 외엔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성인이 되며 본연의 삶을 살 수 있게 됨과 동시에 공부에서도, 공부 외적으로도 선택지가 많아지면서 그중 하나의 선택지를 선택한 것에 대해 당연함을 부여하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또한, 일전에 글(별 거 아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을 한번 썼듯 한번 망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은 의지가 약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하면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당연함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필자가 찾아낸 대안은 관점을 살짝 바꾸는 것이다. 즉,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해당 질문에 대한 답을 나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적합한 상황에서 찾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듯 당연함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가 만들어버리면 굳이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자격증을 공부하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물론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아 특정 요일을 잡고, 미리 공부를 해와 서로 질문을 하고 답을 못하면 벌금을 내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은 돈으로 놀러 가든 밥을 먹든 술을 먹든 공공재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와 친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필자는 이 방법으로 학업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건 이로 인해 돈을 많이 잃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나중엔 도리어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서 했다면 절대 그만큼 공부를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할 때 필자는 미래의 필자를 '물'이라 생각하고 현재의 필자는 그 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게끔 수로를 설계하고 파놓는다. 그리고 그 후엔 그 수로를 따라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경험 상 그 설계에 '친구'와 '돈'이라는 요소가 적절하게 쓰인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설계할 수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계획할 때 나의 의지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과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파악한 나의 특성을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