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장미
우리 아이가 아프다. 죽을 날이 나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 또한 들었다. 마음이 무너져서 눈 앞이 깜깜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아이가 아픈 걸까.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의사 선생님 앞에서 꼴 사납게 울었다. 꺽, 꺽, 숨이 막히는데 공기가 폐 안으로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아이 아빠랑 함께 나가있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는다. 밝은 웃음소리가 귀를 찌르는데 그것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조금만 더 길게 살게 해주세요. 아이가 교복만 입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어느 이름 모를 신인지, 당장 눈 앞에 있는 의사 선생님께인지 모를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아이가 자란 모습을 상상으로만 봐야 한다는 사실이 목을 죄여왔다.
그 이후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금방 남편의 도움을 받아 아이의 입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동들이 모여 있는 작은 병동은 4명이 한 병실을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작고 소박한 곳이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아이가 지내기에 나쁘지 않은 공간이긴 했지만 이곳에서 아이가 숨을 거둘 때까지 있을 걸 생각하니 그리 만족스러운 공간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 열매. 아이의 예쁜 이름이 침대 위에 걸리고 아이가 좋아하던 물건들이 침대 주위를 차곡차곡 채운다. 병동에서 쓰는 이불을 치우고 자두가 잔뜩 그려진 이불을 대신 깔아 주었고, 열매가 꼭 끌어 안고 잠에 드는 곰인형도 옆에 두었다. 입원실에서 치료를 받지 않는 여가 시간동안 쓸 스케치북과 미술 용품, 동화책, 글자 공부를 하던 쉬운 학습지까지 채워 놓으니 아이의 방과 병실이 다를 바가 없다. 옆에 있는 아이들은 이미 이곳에서 오래 있었던 건지, 눈에 생기를 잃었다. 새롭게 들어온 열매를 반기는 기색이 보이면서도 크게 밝은 티를 내지 않는다. 그 아이들 옆에 있는 부모도 예의 있게 인사를 할 뿐 그리 반가운 기색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질감이 섞인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와 남편을 바라봤다. 열매는 새롭게 저가 지내게 된 곳이 마음에 드는지 그렇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 로비에서 입원 병동까지 안내 받을 때까지 이곳저곳에 호기심을 보이며 내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 모습까지도 마음을 미어지게 한 건 내 마음이 약해진 걸까. 당연히 그럴 일이었던 걸까.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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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열매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하나둘씩 툭툭 꺼내기 시작했다. 앞에 애기가 보여. 애기가 방금 태어났나봐. 저 애기는 오늘 일어섰어. 엄마, 나는 언제부터 걷기 시작했어? 열매는 처음부터 걸었지, 응?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투성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간식을 먹다가도 툭툭 내뱉는 말을 이해하기까지 정말 한참이 걸렸다. 하루가 금쪽 같았고, 보내는 시간이 아쉬운 마당에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헛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같았다. 그래서 더욱이 열매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딸기는 맛있어. 빨갛잖아. 그래서 기쁜 애기가 보여.”
“딸기가? 딸기를 먹으면 보이는 거야?”
열매는 과일을 먹으면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면서 사온 과일 바구니를 하나씩 비우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과일을 먹으면 꼭 무엇을 본 것처럼 아이는 말을 하곤 했다. 딸기는 빨갛기 때문에 기쁜 것이 보이고, 그것은 사과도 마찬가지였다. 멜론이나 키위 같은 과일은 초록색이라서 평화로운 날들을 보는 것 같았고, 맛에 따라 보는 시기도 다른 듯 했다. 죽을 때가 되어서 아이의 머리에 혼란이 온 게 아닐까, 혹시 이상한 게 아이 곁에 있는 게 아닐까, 나쁜 걱정이 자꾸 솟아 올라서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고, 점집에도 찾아가봤지만 아이의 병 외에는 이상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멀쩡해서 그렇게 물어보는 날 이상하게 바라보기까지도 했다. 열매가 보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아이가 이상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더 들은 후에야 차근차근 아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저 친구 이름은 원래 튼튼이였는데, 지금은 왜 연주야?”
과일은 열매에게 과거를 보게 한다. 오늘 점심을 먹기 전에 허기가 진다며 칭얼거리기에 가볍게 사과를 깎아 주었더니 그런 이야기를 했다. 사과를 아삭아삭 갉아 먹으며 제 앞에 있는 침대에 앉아있는 아이를 가리킨 열매가 자신이 보고 있는 과거를 설명했다. 아마 앞에 앉아 있는 연주라는 아이의 태명이 튼튼이었나보다.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제 아이의 태명에 부모가 놀란 듯이 열매를 바라봤고, 열매는 그런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앞의 아이에게 이름에 대해 묻기 바빴다. 아직 병이 심하게 퍼지지 않아서 움직이는 게 자유로운 열매는 저가 먹고 있던 사과를 손에 쥐고 연주의 앞에 앉았고, 둘은 금방 친구가 되어 튼튼이라는 이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친해진 아이들처럼 그의 부모와 제대로 된 인사를 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의 태명이 튼튼이었다고 이야기해주며 연주의 부모는 연주가 아프지 않았던 날들을 추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의 병간호 때문에 잊었던 추억이 몽실몽실 피어올라서 아프면서도 즐거워보이는 얼굴이다.
“아이가 신기하네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네. 저도 잘 모르는데 가끔 저렇게 이야기를 하곤 하더라고요.”
“튼튼이었는데. 제가 꼭 잘못한 거 같아요, 저렇게 아픈 걸 보면….”
에이, 아니에요. 그게 왜 잘못이에요. 등을 가볍게 토닥이자 연주의 어머니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느껴진다. 금방 우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나는 이 사람이 느끼는 기분을 잘 알고 있다. 아이의 병이 꼭 제 잘못 같은 기분을 말이다. 작은 어린 아이가 병실에서 주사를 맞고 엉엉 울 때, 약을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릴 때, 치료를 받아야 해서 치료실로 데려갈 때, 나와 이 사람은 늘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이에게 죄를 짓는 기분, 내 잘못으로 아이가 병을 얻은 기분, 이겨낼 수 없는 죄책감까지 말이다.
열매 덕분에 오늘 내 기분을 똑같이 느낀 친구를 얻었다.
**
열매는 연주와 단짝이 되었다. 과일을 늘 나눠 먹었으며 연주에게 그 이후에 보이는 것을 꼭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연주는 그게 무슨 이야기든지 반짝반짝한 눈으로 집중해서 열매의 말을 잘 들어주곤 했다. 연주의 부모도 열매가 하는 이야기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넘기기 시작해서 나도 열매가 하는 말을 가만히 앉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 친구에게 열매가 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아이가 하는 재밌는 이야기려니 하고 넘기는 모양이었다. 튼튼이라는 태명은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래서 더욱 편안하게 아이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가 보는 누군가의 과거는 꼭 이야기책의 이야기와 같았다. 열매는 나이에 비해 말을 잘하는 편에 속했지만, 어른처럼 그렇게 능숙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해주진 못했지만, 중요한 단어나 재미있는 표현은 꼭 제대로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가 본 것을 따로 기록했다. 추억으로 남길 무언가가 필요해서 나도 모르게 시작한 일이었다. 열매가 무슨 과일을 먹었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했는지 적는 것은 내 하루 일과 속에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늘의 간식은 바나나였다. 긴 바나나를 쥐어주면 익숙한 노래를 부르며 바나나 껍질을 혼자 까보려고 하는 열매의 모습이 좋았다. 아이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자기가 먹을 과일은 꼭 자기 손으로 고르기 시작했다. 노오란 바나나 껍질을 예쁘게 까면 하얀 속살이 보인다. 작은 입으로 한 입 베어물고 나면 열매는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옛날에 존재했다던 이야기꾼이 된다. 연주와 나, 남편까지 관객 셋을 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야기꾼 말이다.
“열매야. 노란색은 무슨 이야기야?”
“노란색은 따뜻한 이야기야. 병아리색이잖아.”
“바나나는 병아리야?”
응! 열매는 밝게 웃으며 바나나를 베어 문다. 옆에 앉아 있던 연주도 함께 맛있는 간식 시간을 즐긴다. 이야기를 당장 시작할 줄 알았는데 열매는 덧붙여 말을 하지 않고 바나나를 즐기기 바쁘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걸까? 따뜻한 이야기를 금방이라도 시작할 것처럼 하더니 아무 이야기가 없다. 열매는 바나나를 다 먹고 껍질을 내게 내밀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간식을 깔끔하게 비우고, 다시 연주와 인형놀이를 시작했을 뿐이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다시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니 걱정부터 앞섰다. 늘 변화에 예민했지만 열매가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는 더욱이 그랬다. 매번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늘 하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아이의 입술을 열어 이유를 듣고자 했지만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이 신기한 일을 입에 담고, 열매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결국 아이가 진료실로 나설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
걱정은 진료실로 나서며 금방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마치 병아리처럼 뒤뚱뒤뚱 걷던 아이는 지나가던 한 환자를 가리키며 큰 소리를 냈다. 처음 보는 사람을 가리키기에 놀라 아이를 안아드니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는지 입을 우물거린다. 과일을 먹은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무언가 보일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열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저씨는 할머니랑 살았네. 할머니가 예쁘다고 해줬어.”
“뭐?”
“할머니가 ‘오래오래 살아야지, 내 새끼.’라고 해.”
“…….”
“아저씨는 오래 살 거지요?”
열매는 생기를 모두 잃은 눈을 보고 그렇게 물었다. 열매가 가리킨 환자는 살이 고통과 함께 다 내려가버린 듯 홀쭉 마른 사내였다. 눈이 퀭하고 피부가 거무죽죽해서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른인 나조차도 겁이 날만큼 흉한 몰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는 겁도 나지 않는지 내 품에서 내려와 그 이의 바지를 죽죽 잡아 당겼다. 아저씨는 시골에서 살았어요? 파란 물이랑 초록색 나무가 많아요. 아저씨 집은 거기 맞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아저씨 놀리지 말고 엄마따라 얼른 가렴.”
“내가 봤어요! 할머니가 내 새끼라고 불렀잖아요.”
남자의 눈이 초점을 정확히 잡지 못하고 쉼없이 흔들린다. 많은 생각이 그의 주위로 오고 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바나나를 먹으며 열매가 본 과거는 저 환자의 것이었나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다가 남자를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나보다. 나는 열매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가만히 놔두었다. 열매에게 바지가 잡힌 남자는 내가 열매를 말려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일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매는 꼭 누군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색이든, 어떠한 온도였든, 무슨 감정을 가지게 했든 소중한 이야기라는 사실만은 늘 변함이 없었다.
“살기 싫어요?”
열매가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했다. 열매야!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크게 실례되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재빨리 입을 막았다. 열매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에 놔두어도 괜찮다 생각했는데 아직 아이라 상대방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하지 못했다. 나는 허리를 깊게 숙이고 남자에게 사과를 했다. 아이가 함부로 말을 해서 죄송해요.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내 말에 남자는 아주 느리고 느린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들이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이 이름이 뭔가요?”
“네?”
“병실에 찾아가도 괜찮나요?”
남자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또렷해보이는 동공이 나를 담뿍 담고 있었다. 쉽게 알려줘도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열매는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알려주었다. 병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쉽게 이야기하며 그 남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시 보자며 하는 인사는 꼭 친구를 대하는 모습과 같았다. 저 사람의 과거를 봐서 그럴까 남자를 대하는 모습이 퍽 친근해 보였다. 작게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뜬 건 나와 열매였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를 지나쳐 진료실로 향했다.
아이는 늘 마음을 덜컥덜컥 고장나게 만드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진료실을 다녀온 후 금방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똑똑,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남자가 우리 병실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어울리지 않게 간병인 자리에 앉은 남자는 열매에게 열매가 본 것을 계속해서 물었다. 집의 모양과, 할머니의 생김새, 할머니와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물었다. 아마 그는 열매 정도 되는 나이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열매는 눈 앞의 남자가 제 또래처럼 보였고, 그것이 아이가 남자에게 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였나 보다. 열매의 말을 꼭꼭 새겨들은 남자는 별안간 내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남자는 열매가 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열매가 본 것은 이 남자의 과거였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가장 따뜻했던 나날들을 잠깐 잊고 살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삶의 이유를 잃고, 마음의 병인지, 몸의 병인지 모를 것과 함께 하루하루를 버리듯 살아가던 자신에게 할머니의 이야기는 꼭 무언가를 깨우는 이야기 같았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삶을 조금 더 긍정적이게 바라볼 수 있게 된 남자는 저에게 마법을 선사한 열매를 대신하여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이를 만나서 너무 기쁘다며 초콜릿을 쥐어준 남자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삶의 기운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그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아이가 본 것을 적어둔 기록도 잔뜩 늘어났다. 아이가 과일을 하루에 한 번씩 꼭 먹어서인지 이야기는 풍부하게 많았고, 내 손은 늘 바쁘게 그 기록들을 적어내려갔다. 남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열매는 지나가다가 처음 본 환자나 간병인, 간호사, 의사들에게 과거를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나나 남편의 과거, 연주의 과거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잊고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새삼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열매가 주위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엄마, 오늘은 포도 먹고 싶어.”
“포도? 포도가 좋아? 어떤 색깔?”
“보라색! 나 그거 먹을 거야.”
과일 바구니에 가득 채워진 과일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라색으로 잘 익은 포도를 가리킨 열매는 제 앞에 놓여진 스케치북에 보라색 동그라미를 잔뜩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제부터 자신이 먹을 포도를 열심히 그리는 모양이다. 나는 포도를 씻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다. 작은 병동은 오늘도 조용하고 따스했다. 복도 한 켠에 놓여진 싱크대에 가기 위해 발을 옮기며 병실들, 내 옆을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열매가 남자와 만난 이후 생긴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열매가 누구의 이야기를 언제 갑자기 할 줄 모르니 병동 사람들의 얼굴이라도 외워보고자 하며 생긴 것이다. 상상도 안 해본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처음 열매가 병을 진단 받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병은 야금야금 열매를 잡아먹고 있었고, 차도는 크게 없었다. 수명은 늘 당장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는 생각을 해야 했고, 긴급 상황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병원에서의 하루는 단 한 번도 편안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마 열매가 여는 소박한 이야기 시간 때문이겠지. 잠시나마 남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분산시킬 수 있는 것이 나에게 작은 숨구멍을 만들어줄 수 있는 건지 몰랐다. 지금 당장도 포도를 씻으며 오늘 아이가 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너무 모순적인 존재인가보다. 아이가 아무 짐도 들지 않았음하면서도 아이에게 내 작은 숨구멍을 짊어지게 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것을 아이의 등에서 내려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내가 우습다.
“열매야, 포도 먹자.”
“우와!”
보라색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과일의 색이다. 열매가 좋아하는 과일은 대부분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과 같은 따뜻한 색을 가진 것들이었고, 차가운 색의 과일들은 손을 잘 대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도 조금 일렁였다. 이게 나쁜 과거를 보게 해서 아이가 겁을 먹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매는 즐겁게 포도를 따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씨가 없는 과일이라 아이는 크게 어려워하지 않으며 포도송이를 입 안 가득히 채워 넣는다. 보라색 껍질은 차곡차곡 쟁반 위에 쌓이고,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지 모르는 나만 불안함 속에서 아이를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보라색은 무슨 이야기야?”
“음, 모르겠어.”
“응?”
“열매가 모르는 느낌이야.”
열매는 거기에 말을 더 덧붙이지 않고 포도 먹는 데에만 집중을 했다. 혼자 먹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꼭꼭 엄마인 내 입에 포도를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평소처럼 당장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지만 아이가 밝아보여서 걱정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아이가 입에 넣어 준 포도를 씹어본다. 단 과즙이 입 안에서 머물고 말캉한 과육은 금방 식도를 지나 위로 내려간다. 내가 늘 알던 포도 맛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지만 아이가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기쁘게 한다. 송이에 알이 거의 다 사라지기 시작할 때쯔음에야 열매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야.”
“응?”
“엄마랑 아빠야.”
“엄마랑 아빠가 보여?”
“응. 엄마랑 아빠가 열매랑 있어.”
나는 열매가 처음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일은 언제나 열매에게 누군가의 과거를 보게끔 했지만 지금만큼은 우리 세 가족이 함께 있는 미래를 보는 것이면 좋겠다. 아이가 건강해지고, 삶을 이어가고, 미래의 자신이 멋있게 성장한 모습을 열매 스스로가 보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열매는 아가야.”
“많이 아가야? 열매는 지금도 엄마 아간데?”
“아니야. 많이 아가 아니야. 근데 다른 아가도 있어.”
연주인가? 연주라면 이름을 이야기 했을 텐데. 열매는 포도를 우물거리며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새로운 얼굴은 열매도 모르는 아이인 것 같았다. 이름을 알면 꼭꼭 그렇게 부를 텐데 새 아가라는 이야기만 하고 더 말을 잇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와 열매가 보인다고만 할 뿐 평소처럼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는다. 아이가 이해하기에 어려운 상황인가 싶어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혼자 충분히 생각을 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하고, 너무 어려운 것이라면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때 조금 더 물을걸. 괜한 후회로 눈물을 흘린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
**
열매가 갑자기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매일 내 앞에서 과일을 먹고 조잘조잘 이야기하던 아이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누워있는 열매만 눈에 가득 찬다. 눈물샘이 고장나서 시도 때도 없이 울기 시작한 것은 열매가 지독한 병을 이기지 못한 시점과도 같았다. 교복이라도 입게 해주세요. 내 말을 들은 신은 없었던 걸까. 왜 아이는 일 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이곳을 떠나려고 할까.
다정함이 가득한 아이는 우는 나를 볼 때면 손을 잡고 가만히 웃었다. 히, 작게 나는 소리가 티 하나 없이 해맑기만 해서 더욱 눈물을 불렀다. 이 아이의 손을 내가 어찌 놓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애 없이 홀로서기를 할 수나 있을까.
“엄마.”
“응? 응. 열매야.”
“보라색은 전부야.”
“…….”
“무지개 마지막이라서 전부인가봐.”
열매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이 암호같은 말을 붙잡고 몇 해를 그냥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남편과 연주의 부모, 그 외의 사람들로 겨우 일어섰을 때는 정말 열매가 교복을 입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쯤이었다. 일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의 말을 이해했다.
과일은 먹는 열매이면서도 과거였고, 또한 매일이기도 했다.
열매가 포도를 먹으면서 본 것은 내가 살아온, 또 내가 살아갈 매일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탄생을 보고 기뻐하는 어미의 모습도, 죽음에 고통을 끌어안은 어미의 모습도 모두 보고 떠난 것이다.
그것을 알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열매의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처음 봤다던 아이는 누구일까. 열매는 나의 매일을 어디까지 보고 간 것일까.
나는 다 듣지 못한 그 말을 더듬으면서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열매가 말한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열매처럼 쉬이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과, 열매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살포시 덮어놓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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