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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혼자가 아니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때 온다

멈추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제야 보였다

by Defin

나는 J다. 통제 가능한 변수를 늘 계산하고, 모든 일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내가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굴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늘 일정표를 머릿속에 그리며, 모든 일을 관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몽골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 성향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처음 깨달았다. 그건 완벽주의가 아니라 불안이었다.통제는 완벽주의가 아니라 불안의 동의어일 뿐이다.


몽골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모든 게 낯설게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사람보다 많은 하늘, 소음 하나 없는 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이상하게 답답해졌다. 나와 맞지 않는 P 성향의 다섯 명, 계획 없이 흘러가는 하루, 그리고 나만을 바라보는 열 개의 눈동자. 공감되지 않는 농담과 낯선 코드들. 그 속에서 나는 섞이고 싶었지만, 섞이는 게 무섭고 불편했다. 그들의 즉흥적인 에너지 앞에서 나는 그저 버티는 일에 집중했다. 계획이 없는 하루는 내게 휴식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모닥불 앞에 앉아 불꽃이 타오르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사람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진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불꽃이 커질수록 마음속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뜨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늘 상처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거리를 두고, 마음을 열기 전에 잃을 걸 계산했다. 결국 나를 고립시킨 건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가 경험한 세상으로 세상을 판단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몇몇 사람들로 ‘인간’을 정의했고, 그 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재단했다. 사회생활을 스무 살에 시작했던 탓에, 내 또래들이 사회 초년생으로 회사를 들어갈 때 나는 이미 4~5년 차 직장인이었다. 친구들이 입사 첫날을 SNS에 올릴 때, 나는 호텔의 좁은 휴게실에서 쉬는 법을 잊은 채 커피를 마셨다. 그 시절 힘들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모른 척했고, 가족은 “그 얘기 나한테 하지 마”라며 선을 그었다. 나는 혼자였다.


그런 시간이 쌓이며 사람을 믿지 않게 됐다. 누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 그렇게 사는 거야.’ 그런데 그 냉소의 밑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너희는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한 번이라도 들어줬잖아? 아니, 한 번도 없었잖아. 나는 그때 혼자였잖아.’ 그 아이가 아직 내 안에 있었다. 모난 아이, 외로움에 삐친 아이, 인정받지 못해 여전히 서운한 아이. 몽골의 고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불안할 때마다 도망치고, 상처받을까 봐 미리 거리를 두며 살아온 시간들. 나는 늘 ‘나’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재단했다. 모닥불 앞의 불꽃은 유난히 뜨거웠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진심의 온도’ 같았다. 나는 타인에게 진심을 주는 일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을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인정했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상처받을 자신을 두려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지난 인간관계를 하나씩 떠올렸다. 요리할 때의 나, 푸드 디렉터로 현장을 누비던 나, 스타일리스트로 촬영장을 뛰어다니던 나. 브랜드를 기획하고 디자인을 배우며 다른 이름으로 다시 살아보려 했던 나. 그리고 최근, 끝내 연락을 끊어버린 친구들까지. 그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늘 어딘가 묶여 있었다. 손목에도, 발목에도, 목에도 보이지 않는 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늘 숨이 막혔다.


그 사슬은 누가 채운 게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인정받고 싶어서, 상처받기 싫어서, 완벽해지고 싶어서, 나는 나 자신을 조여왔다. 그런데 그날, 몽골의 차강소브라가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초원의 바람이 불어오고, 멀리서 들려오는 말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 순간, 오래 묶여 있던 사슬이 ‘딸깍’ 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공기에는 비난도, 비교도, 증명도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였다. ‘그래, 나는 달리지도, 잘 쉬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해방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밖을 봤다. 비행기 아래로 흐르는 구름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인 건 처음이었다. 더 이상 남을 미워하지 않는 내가 있었다. 나를 오해했던 사람도, 나를 밀어낸다고 생각했던 세상도, 무엇보다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몽골의 바람은 그렇게 나에게 하나의 문장을 남겼다.
“진짜 고요는 혼자 있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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