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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도 불안한 사람, 멈춰도 움직이는 사람

휴식의 모양을 한 또 다른 도망

by Defin

몽골로 떠난 건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생애 첫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다짐했다. “이번엔 진짜 쉰다. 그동안 못해본 걸 다 해보자.” 그건 나에게 주어진 보상 같았다. 남들은 이직 준비나 자격증 공부를 한다지만, 나는 그냥 살아보고 싶었다. 나답게,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하지만 막상 ‘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몸은 멈춰도 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뭘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자체 팝업스토어를 열고, 디자인 작업을 하고, 여행을 다녔다. 처음엔 자유로웠다. 그런데 점점 그 자유가 나를 조여왔다. ‘이건 쉬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일 아닌가?’ 어느새 나는 쉬는 동안에도 성과를 내야 안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멈춰 있는 내 자신이 무서워서, 쉼을 콘텐츠로 만들고 있었다.


그 시기 나는 나를 새로 디자인하려 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씨스타의 서른이 되기전에 결혼은 할런지 라는 가사를 들으며 결혼은 못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살이라도 빼야지. 그렇게 헬스장을 다니고, 식단을 관리하고, 결국 쌍꺼풀 수술까지 했다. 마치 외형이라도 바꾸면 인생의 방향도 바뀔 거라 믿었다. 체중은 15킬로그램이나 줄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거울 속의 나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 안에 있는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더욱이 더 깐깐하고 날카롭고 까칠하고 타인의 침입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치와와가 있었다.


그때부터 비효율적인 연애는 하지 않기로 했다. 결혼하지 않을 사람과 시간을 나누는 게 낭비처럼 느껴졌다. 대신 결혼정보회사에 유선 상담을 신청했다. ‘이 시간이 끝나면 이제는 제대로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끝나면’이라는 말은 계속 미뤄졌다. 시작은 오지 않았다.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불안했고, 그 불안을 덮기 위해 자꾸 무언가를 만들었다. 쉬어야 하는 시기에도 ‘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애썼다.


사실 그 시절, 직장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또다시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기 싫었다. 솔직히 어떤 직장에 들어가야 할지도, 내가 뭘 잘하는 사람인지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낙오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와중에도 겉모습은 챙겨야 했다. 밖으로 보이는 이미지만큼은 무너지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꾸 돈도 안 되는 자아실현형 팝업을 만들고, 의미 없이 떠나고, 몽골로 갔다. 그게 그나마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행위 같았다. ‘그래도 뭔가 하고는 있잖아.’ 그 한 문장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건 휴식이 아니었다. 그건 ‘일하지 않는 형태의 일’이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면서도 뭔가에 쫓겼고, 멈출수록 불안해졌다. 누군가는 대기업으로 이직했고, 누군가는 헤드 셰프가 되었다. 나는 요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여전히 급여는 낮고, 아무도 나를 ‘성공했다’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초라했다. 그래서 자꾸 일을 만들었다. 일이라는 포장지 안에 나의 불안을 숨기고, 그 안에서만 나는 존재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주변의 인간관계도 바뀌기 시작했다. 직장인 친구들은 점점 멀어졌고, 대신 프리랜서나 창업자, 크리에이터들과 가까워졌다. 정해진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는, 불안정하지만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는 일과 자존감, 돈과 가치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게 내 마음의 언어와 더 맞았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인간관계의 챕터를 열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단지 ‘휴식의 형태를 한 또 다른 도망’이었다. 몸은 멈췄지만 마음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나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 쉼조차 증명해야 안심이 되는 사람, 그렇게 나는 도망의 또 다른 계절을 통과하고 있었고 몽골로 쫓기듯 부리나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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